리메이크 미드 V(브이) - 제1부 PIOLT

1983년 미국에서 5부작의 제1부제2부가 방영된 이래, 26년 만에 동일한 제목의 리메이크 드라마 ‘V’가 ABC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리메이크 ‘V’는 예고편을 통해 예상했던 바와 같이 오리지널의 요소들을 해체 및 재조합하고, 최근 미국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경향과 CG를 비롯한 특수 효과를 가미한 작품이었습니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전 세계 29개 대도시에 출현한 외계인의 거대 UFO 중 최고지도자 애나의 모선이 뉴욕의 상공을 점거하는데, 오리지널의 주배경이 LA였던 것과는 다릅니다. 진동으로 인해 십자가가 추락하는 장면과 라이언의 청혼 반지가 흔들리는 모습은, 외계인으로 인해 신성이 추락하고 라이언의 청혼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리메이크의 UFO 등장 장면에 아쉬움이 있다면 미국과 브라질, 런던과 파리, 카이로 등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의 도시들이 등장했지만 아시아의 도시는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뉴욕의 UN 빌딩 옥상에서 UN 사무총장과 존이 만나며, 지구인과 외계인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던 오리지널과 달리, 리메이크에서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동영상을 활용한 간접적인 수단으로 애나가 지구인들에게 첫선을 보입니다. 매력적인 애나의 연설은 즉시 지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의 허점을 활용해 지구인들의 마음을 얻는 애나는, 의료보험 제도의 개선을 약속한 오바마를 풍자한 것이라는 미국 내의 흥미로운 평도 있습니다. 애나가 오리지널의 다이애나라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데, 상관이었던 존과 파멜라와 권력 다툼을 벌여야했던 다이애나와 달리, 현재까지 애나의 상관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1983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백인인 레이건이었고, ‘V’의 다이애나는 백인 여성이었는데, 2009년 현재 미국 대통령은 흑인인 오바마이고, 애나로 흑인 여배우인 모레나 바카린이 캐스팅된 것은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합니다. 오리지널에서 존은 화학합성물을 만들기 위해 지구를 방문했다고 목적을 밝혔지만, 리메이크에서 애나는 지구에서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방문했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화학합성물이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물과 식량(인간)을 확보했던 오리지널에 비해, 리메이크의 외계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구인들을 위해 자신들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공유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떠나겠다고 피력한 것은 오리지널과 동일합니다. 외계인들에게 성(姓)이 없이 이름만 있는 것도 오리지널과 같습니다.

리메이크에서는 외계인들을 가리켜 ‘Visitor’의 머리글자를 따 ‘V’라 부르는데, 오리지널의 극중에서 ‘V’는 레지스탕스의 승리(‘Victory’)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대조적입니다. 따라서 ‘V’자 핏빛 낙서가 저항을 의미했던 오리지널과 달리, 리메이크에서는 외계인들을 숭배하기 위한 정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오리지널에서는 외계인을 목소리의 에코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리메이크의 외계인의 목소리는 지구인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레지스탕스의 회합에서는 귀 뒤의 피부를 절제하여 두개골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외계인 여부를 확인했는데, 피부를 절개하는 것도 ‘V’자형입니다.

외계인의 모선과 수송선의 디자인은 보다 전체적으로 세련미를 띠며 디테일이 추가되었지만, 확실히 오리지널의 이미지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복도와 방, 그리고 인간을 식량으로 보관하는 대형 냉동 창고와 식수 창고를 제외하면 답답한 느낌을 주었던 오리지널의 모선의 내부와 달리, 리메이크의 모선의 내부는 타일러가 매료되었듯이, 탁 트여 개방적이며 유토피아와 같은 도시입니다. 외계인들의 복장도 일신했습니다. 붉은 군복과 커다란 고글. 검정 가죽 장화의 고압적인 오리지널의 외계인들의 복장은, 리메이크에서는 전문직 종사자의 깔끔한 정장 스타일의 근무복처럼 바뀌었습니다. 제1부에서 이미 권총 타입과 소총 타입의 2종류의 외계인의 총기류가 등장했던 오리지널과 달리, 리메이크에서는 아직 외계인의 총기류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감시와 살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소형 비행 병기는 리메이크만의 신설정입니다.

애나에 맞서는 여주인공은 철없는 10대 후반의 외아들을 둔 싱글맘인 FBI의 대 테러 요원 에리카입니다. 오리지널에서는 줄리엣과 다이애나 두 라이벌이 모두 과학자였는데, 리메이크에서는 에리카와 애나 모두 과학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에리카가 FBI의 요원인 것은 9.11 테러 이후, 미국 본토에서 자행되는 테러와 음모론이 미국 드라마의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주인공의 수사 능력을 활용한 스릴러가 리메이크의 주된 장르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거대 UFO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외계인이 지구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설정은, ‘맨 인 블랙’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 등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설정이지만, 거대 모선을 통한 대규모 등장이 외계인의 최초의 등장이었던 오리지널과는 차별되는 것입니다.

오리지널 제1부에서 외계인의 정체를 마이크가 밝혔던 것처럼, 리메이크에서는 에리카가 그 정체를 밝혀냅니다. 마이크가 격투 끝에 가면을 벗긴 것이 생면부지의 외계인이었던 것과 달리, 에리카는 신뢰했던 파트너 데일이 배신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의 가면을 벗깁니다. 짙은 초록색의 오리지널의 외계인의 원색의 피부색에 비해, 리메이크의 외계인의 피부는 검정색에 가깝습니다. 오리지널에서 외계인의 두 눈은 가면의 두 눈의 위치와 동일했는데, 리메이크에서는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뒤통수에 가깝게 파충류의 눈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에리카는 레지스탕스의 회합에서 가톨릭 신부 잭과 만나는데, 자신이 추적해온 용의자가 외계인임을 확인합니다. 잭과 함께 근무하는 성당의 노신부는 외계인의 방문으로 인해 신자 수가 늘어난 것에 반색하지만, 잭은 외계인의 존재와 바티칸의 안일함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예고편을 통해 예상했던 것보다는, 신과 외계인의 관계를 깊이 파고들지 않았는데, 잭은 오리지널의 앤드류 신부의 직업을 계승했지만, 조연에 불과했던 앤드류 신부보다는 마이크에 가까운 주인공입니다.

예고편을 통해 오리지널의 마이크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했던 의문의 사나이 라이언은, 실상은 오리지널의 마틴이었습니다. 라이언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리메이크 ‘V’ 제1부의 최대 반전이었습니다. 오리지널 5부작이 종료될 때까지 마틴은 ‘선한 외계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파충류의 피부가 드러난 적이 없는데(존과 다이애나, 브라이언, 심지어 윌리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외계인 캐릭터들이 파충류의 피부를 노출한 것에 비하면 마틴은 특별대우를 받은 셈입니다. 후속 19부작에서 마틴이 다이애나에 의해 살해당할 때, 파충류의 피부를 노출합니다.), 라이언은 처음부터 파충류의 피부를 드러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리지널에서 마이크는 이혼남이었고, 줄리엣은 남자친구와 동거했는데, 리메이크에서는 라이언에게 동거녀 발레리가 있으며, 에리카는 이혼녀(혹은 남편과 별거 중)로 성(性)이 뒤바뀌었습니다. 라이언과 발레리를 둘러싼 예상 가능한 전개는, 발레리를 동족에게 잃으며 라이언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기폭제가 되는 것이겠지만, 반대로 발레리가 라이언의 정체를 눈치 채고 스스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의사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은 끝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줄리엣과 동거남의 사이와 비슷해집니다. 하지만 라이언이 외계인이라는 이유로 발레리가 결별을 결심한다면, 리메이크는 ‘디스트릭트9’처럼 ‘차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을 요구받을 것입니다. 오리지널에서 마이크와 마틴의 관계는 리메이크에서 조지와 라이언의 관계로 계승되었는데, 오리지널의 내러티브가 마틴보다 마이크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리메이크에서는 조지보다 라이언을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오리지널에서 마틴은 다이애나의 부관이었는데, 라이언은 애나와 어떤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라이언이 설령 애나와 구면이 아니라 해도, 다른 외계인 캐릭터들과 분명 관련을 맺고 있을 것입니다. 라이언 니콜스는 지구인 행세를 위한 가명으로 보이는데, 성(姓)이 없는 외계인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타일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친구 핑계를 대는 철없는 10대로, 외계인에게 매혹당하고 리사에게 반해 ‘외계인의 평화 대사’가 되는데, ‘외계인의 친구들’이 되어 제복을 지급받고 앞잡이가 된 오리지널의 다니엘이나 ‘개조’되어 스파이가 되었던 마이크의 아들 숀을 연상시킵니다. 제2부의 예고편을 보면, 타일러가 리사와의 섹스를 통해 정자 제공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리사가 타일러에 접근한 것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인과 외계인의 혼혈을 출산하기 위한 외계인의 거대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럴 경우 타일러는 단순히 다니엘이 아니라, 외계인 혼혈아 출산을 위한 대리모가 되었던 로빈과 같은 위치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리메이크에서 외계인 혼혈아의 어머니는 리사가 될 텐데, 그녀의 이름 리사가 엘리자베스의 애칭인 것에 주목합니다. 엘리자베스는 히브리어로 ‘신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지닌 구원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오리지널에서 지구 멸망을 막았던 외계인 혼혈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따라서 리사는, 케네스 존슨이 각본에 참여한 리메이크 제작진의, 차후 전개를 암시하는 의도적인 작명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출세를 꿈꾸는 언론인 채드는 오리지널의 크리스틴이 남성으로 바뀐 것입니다. 채드는 애나와의 인터뷰를 통해 외계인의 대변인이 되는데,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지니고 있으니, 결정적인 순간에 전 세계적으로 외계인의 정체를 폭로하는 보도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채드가 외계인과 레지스탕스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한다면, 리메이크 ‘V’가 보다 매력적이고 복잡한 스릴러가 될 것입니다. 한편, 그가 애나의 호감을 샀던, ‘모든 외계인의 외모는 매력적이다’라는 언급은, 파충류의 원래 피부 위에 지구인의 가면을 덮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현대의 성형 수술을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제2부의 예고편을 보면, 잭은 외계인에게 검거되어 ‘개조’를 당하고, 에리카가 격투 끝에 죽인 데일이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외계인들이 얼마든지 가면을 바꿔 쓸 수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1부만 보면 오리지널의 충실한 리메이크이면서도 새로운 요소들을 가미하여 만족스러웠는데, 최근 미국 드라마들이 초반에는 흥미진진하다, 마구 벌여놓은 암시(소위 ‘떡밥’)들을 주체하지 못해 음모론에 의존한 나머지 용두사미로 전락했던 것이 비일비재했었음을 감안하면, ‘V’는 내년 3월 이후 이어지는 시즌에서 깔끔한 종결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리뷰를 시작하며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1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2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3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4부
다시 보는 추억의 미드 ‘V’(브이) - 제5부

by 디제 | 2009/11/06 09:25 | 영화 | 트랙백 | 덧글(5)

디스트릭트9 - SF, 현실에 두 발을 내딛다

※ 본 포스팅에는 ‘디스트릭트9’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평 일색인 ‘디스트릭트9’을 두 번째 관람했습니다. 슈퍼 히어로물을 포함해 볼만한 SF 영화가 드문 최근 ‘디스트릭트9’이 이처럼 열렬한 지지를 획득한 이유는 무엇인지 초점을 맞췄습니다.

만일 사전지식 없이 관람한다면,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차용한 초반부에 과연 누가 주인공인지 분간하는 것부터 쉽지 않습니다. 다수의 화자들이 카메라를 보며 술회하는데, 그 중에 비커스(샬토 코플리 분)가 주인공이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다른 화자들은 비커스의 과거지사를 회상하며 그 의미를 말하고 있지만, 비커스를 따르는 카메라는 현재적 관점에서 사건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하지만 UFO와 외계인이 등장하는 SF 영화라면 응당 등장해야 할 잘 생기고 영웅적인 주인공을 찾을 수 없기에 비커스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수용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주인공이라면 러닝타임이 종료되는 순간에 생사의 운명이 결정되겠지만, 조연급이라면 언제든지 죽으며 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비커스는 조연이라 판단하여 그가 위기와 맞닥뜨릴 때마다, 혹시 그가 여기서 죽고 진정한 주인공이 돌출하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인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저히 소시민적인(속된 말로 ‘찌질한’) 비커스는 우리네 보통 사람과 너무도 닮아 있기에, 영웅적인 주인공에 비해 더욱 감정이 쉽게 이입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커스가 영웅적이었다면 눈앞의 이익이나 개인의 생존보다 대의명분과 집단을 위한 희생 및 초지일관을 멋지게 선택하겠지만, 그는 소시민이기에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언행을 번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SF 영화의 멋들어진 주인공들과 확연히 대조됩니다. 물론 비커스가 자신의 언행을 수시로 번복할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반전의 묘미로 십분 활용합니다. 비커스는 초반부 외계인의 알을 불태우는 것을 즐기며, 외계인의 퇴거를 강제하며 핍박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동체에 감염되어 신체의 변화가 발생한 후부터, 외계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퇴거 현장에서 외계인들의 죽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비커스가, 실험실에서 외계인의 무기를 다루며 외계인을 실험대상으로 살해하게 되자 거부한 것이 그 시발점입니다. 이미 실험체로 희생된 다른 외계인들과 마찬가지로 산 채로 해부당하기 일보 직전 실험실에서 탈출한 그는, 자신을 숨겨줄 곳은 디스트릭트9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외계인들이 사용했던 너저분한 집에서 밤을 보내고 외계인들이 먹는 캣푸드를 먹으며 서서히 외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외계인처럼 변화된 왼손가락을 도끼로 절단하며 자해했을 때 엄청난 고통이 밀려옴을 자각한 순간, 그는 자신의 몸에 새로이 깃든 외계인의 육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외계인으로의 육화를 인정한 후, 그는 뒤늦게 영웅으로 재탄생합니다. 나이리지아 갱단이 소유했지만, 인간은 아무도 사용할 수 없었던 외계인의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는 외계인 크리스토퍼를 한때 배신하기도 하지만, MNU 건물 습격이나 크리스토퍼 부자의 지구 탈출을 돕는 결정적인,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 크리스토퍼의 동료가 됩니다. 즉, 외계인들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 20여년 만에, 비커스는 직접적으로 외계인을 돕는 첫 번째 인간이 되었고, ‘디스트릭트9’은 지구인과 외계인의 버디 무비가 됩니다. 크리스토퍼를 모선으로 보내는데 성공한 후, 비커스는 생명을 잃을 마지막 위기에 처하지만, 외계인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합니다. 최후의 순간 그를 위해 2명의 외계인이 희생당할 정도로, 외계인들은 비커스의 구출에 적극적입니다. 이는 외계인들이 비커스를 자신들의 동족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커스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그들’과 동일해지는 것입니다.

정부 정책으로 차별이 자행된 가장 극심했던 인종차별 국가로, 그 상흔이 남아 있는 남아공을 배경으로 했으며, 주제의식 또한 ‘차별’에 초점을 맞췄기에, ‘디스트릭트9’은 SF 영화이지만 실은 매우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영화입니다. 차별의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지 않는 한, 즉 역지사지가 되지 않는 한 피해자의 입장을 헤아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UFO와 외계인을 소재로 고도의 은유를 통해 입증합니다. 전혀 SF 영화의 주인공답지 않은 비커스를 주인공을 내세우고도 수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발을 현실 위에 굳게 내딛은 채 성립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헐리우드가 아니면 SF 영화가 성립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정관념을 깨끗이 불식시킨 ‘제3세계 SF’의 희망이라는 점에서 ‘디스트릭트9’은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수작 SF 영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제작비와 특수효과가 아니라, 현실과 상상력의 절묘한 접점을 찾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물론 현실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부조리로 가득해 9시 뉴스만 봐도 충분히 SF적이라, 극장에서 국내산 SF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디스트릭트9 - 설정보다 이야기로 승부하는 SF

by 디제 | 2009/11/05 09:11 | 영화 | 트랙백 | 덧글(1)

달콤한 인생 - 신은 죽었다,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60년 작 ‘달콤한 인생’의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은, 장 르느와르 감독의 1939년 작 ‘게임의 규칙’의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보다는 쉽겠지만, ‘게임의 규칙’의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이 그러하듯 큰 의미가 없습니다. 주인공인 마르첼로(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분)의 행적을 시간 순으로 나열했지만, 사건의 전후 관계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옴니버스에 가까우며, 각각의 에피소드가 나름의 주제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류 사회의 타락을 낱낱이 까발린다는 점에서 ‘게임의 규칙’과 ‘달콤한 인생’은 유사하지만, ‘게임의 규칙’이 희극적으로 상류 사회를 비판한다면, ‘달콤한 인생’은 지루하리만치 사실적인 관점을 견지합니다.

예수상을 헬기에 매달아 운반하는 오프닝부터 ‘달콤한 인생’은 범상치 않습니다. 예수상이 인간의 문명의 이기인 헬기의 아래에 매달려,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장면을 제시하며 20세기는 ‘신이 죽은 시대’임을 규정합니다. 뒤이어 가톨릭의 ‘기적’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이탈리아인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집착한다’며 냉정히 못 박습니다. 바티칸의 교황청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감안하면, ‘달콤한 인생’을 위해 펠리니에게 많은 용기가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공백을 메울 것이라 서양 철학이 믿었던 이성은 20세기를 지배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이후 상실감으로 가득했던 20세기 중반의 포스트모던한 이탈리아의 풍속도가 ‘달콤한 인생’을 점철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순수 문학을 포기하고 가십 기사에 매달리는 자신을 혐오하는 지식인 마르첼로, 동거하는 마르첼로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 이외에는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엠마(이본느 퓌르노 분), 마르첼로와 결혼하자고 말해놓고 곧바로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막달레나(아누크 에메 분), 모든 이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 헐리우드의 여배우이지만 실상은 약혼자에게 구타당하며 삶의 공허함을 숨기지 못하는 실비아(아니타 에크베르그 분), 유명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불행까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뜯어먹는 파파라치(이제는 일반 명사가 된 파파라치의 어원은 바로 이 작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가족들과의 행복한 삶이 중단될 것이 두려워 어린 자식들을 살해하고 자살한 가장 스타이나(알랭 퀴니 분), 한밤중에서 새벽까지 난교 파티를 벌이는 천박한 상류층, 이혼을 기념하는 파티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중년 여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은 퇴폐적인 타락을 지겨우리만치 반복합니다. ‘달콤한 인생’이라는 제목 자체가 역설적이라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결국 신문기자의 지위마저도 포기한 마르첼로는 더욱 심하게 망가지고, 마지막 장면에서 구원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과 마주치고서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합니다. 마르첼로와 바닷가에서 재회해 뭔가를 간절히 말하고자 했던, 고향을 떠나 일하며 노동의 대가를 소중히 여기는 소녀야말로,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타락을 일삼는 상류층과 대비되며, 크리스트교적인 의미가 아닌 새로운 의미의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와이드스크린 영화 특별전’을 통해 말로만 듣던 거장의 걸작을 뒤늦게 필름으로 만날 수 있었는데, 시종일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174분 분량의 흑백 영화라, 상당한 각오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관람 도중 적지 아니 지쳤습니다. 정확한 러닝 타임을 처음부터 몰랐던 탓인지, 아니면 영화에 짓눌린 탓인지 중간에 자리를 뜨는 관객들도 있었습니다. ‘와이드스크린 영화 특별전’으로 상영되는 영화들을 모두 보고 싶을 정도로 프로그램이 좋아 ‘달콤한 인생’을 이번에 다시 관람하기는 어렵겠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여유 있는 마음가짐으로 재회하고 싶습니다.

by 디제 | 2009/11/04 09:02 | 영화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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