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라서 생전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박정희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게 된 것은 ‘마징가Z’와 장례식 때문이었습니다. 단, 정치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박정희라는 정치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블로그에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니 초점은 철저히 영화에 맞추겠습니다.
‘그때 그사람들’은 개봉이전부터 논란의 정점에 섰던 영화입니다. 소재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실제 정치 상황, 그것도 대한민국의 60여년의 역사에서 유일했던 대통령 암살을 다룬 영화였기 때문에 그런 논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마약 중독자로 더 잘 알려진 대통령 외아들의 가처분 신청까지는 수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이라는 호칭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수구적인 사법부는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영화의 내용 중 다큐멘터리를 삭제한 채 상영하도록 판결했습니다. 따라서 기자 시사회를 제외한 극장의 일반 개봉에서 저와 같은 일반 관객은 삭제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었고 배급사는 배급을 포기했으며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가처분 신청을 수용한 사법부의 판단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역사적 흐름을 영화의 배경인 1979년으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암전으로 시작되어 다큐멘터리 없이 허겁지겁 끝내는 영화를 보며 못내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와 그 부하들을 민주 투사로 보는 시각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상수 감독(그 자신이 초반부에 김재규를 진찰하는 의사로 직접 출연합니다.)은 10.26은 우발적인 결정에서 비롯된 촌극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규정이 역사적으로 진실에 근접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나 당시의 권력층의 비도덕적 행태나 위기 상황에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모습만큼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들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영화의 주연은 백윤식이 분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역이며 ‘지구를 지켜라’와 ‘범죄의 재구성’에서 그랬듯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지만 어쩐지 그보다는 조연으로 몸을 낮추며 정형화된 연기에서 탈피한 주과장(실제 인물 이름은 박선호입니다.) 역의 한석규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중간첩’과 ‘주홍글씨’로 장고 끝에 연속적으로 악수를 두며 계속 실망스런 모습만을 보였는데 이번 선택은 제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조연들이 영화를 시종일관 처지는 부분 없이 깔끔하게 이끌고 있습니다. 민대령(실제 인물 이름은 박흥주입니다.) 역의 김응수, 집사 역의 조상건, 운전사 역의 김상호, 박정희 역의 송재호, 차지철 역의 정원중, 심수봉(영화 제목 '그때 그사람들'은 심수봉의 MBC 대학 가요제 데뷔곡 '그때 그사람'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역의 김윤아까지 모두 영화 속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매우 현실적으로 연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픽션이 분명한 ‘그때 그사람들’을 통해 10.26의 사건 현장을 실제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언어들인 ‘똘아이’, ‘쿨하게’, ‘대차게’ 등의 용어는 몰입도를 떨어뜨리지만 감독이 원하는 것은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닐테니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영화의 흥행 부진의 이유는 아마도 삭제보다는 소재 자체가 관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측면 때문일 것입니다. 박정희를 가난을 면하게 해준 구세주로 기억하는 50대 이상에게는 박정희의 엽색 행각을 고발하고 10.26를 희화화한 이 작품을 보고 싶지 않을 테고 박정희를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30대 이하에게는 무관심한 소재이겠죠. 하긴 영화속에 등장하는 전두환이나 최규하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극중에서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에게 김재규의 암살을 밀고한 비서실장 김계원 역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거나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겠죠. 한 시대의 권력을 틀어쥐면 뭐합니까. 모두 잊혀질 뿐인 걸요. 역사는 촌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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