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 에플렉, 조쉬 하트넷, 케이트 베킨세일 주연에 쿠바 구딩 주니어, 존 보이트, 알렉 볼드윈까지 배우들의 면면은 화려합니다. ‘굿 윌 헌팅’ 이후 주가를 드높인 벤 에플렉 이외에 조쉬 하트넷(군복이 잘 어울리는 진지한 마스크가 마음에 듭니다.)과 케이트 베킨세일(‘뉴 폴리스 스토리’에서도 언급했지만 눈이 크고 광대뼈가 조금 나온 타입의 여자에게는 한없이 약합니다.)이 ‘진주만’ 개봉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들의 배우로서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선남선녀들의 등장이 영화에 해를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살이 찌고 나이를 먹은 중년 아저씨가 된 모습은 알렉 볼드윈과 잘 어울리지 않지만 영화 속의 두리틀 중령이라는 배역과는 잘 맞아 떨어집니다.
소재도 그렇습니다. 미국 중심적 사고 방식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차피 마이클 베이 - 제리 브룩하이머 콤비의 전매 특허 아닙니까. 상상의 산물인 운석을 낙하시켜서라도 지구를 구하는 영웅적인 미국인들을 묘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역사를 바탕으로 한 현실적인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치밀하게 진주만 기습을 준비하는 일본군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묘사한 점도 좋았습니다.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전투 장면도 박력 만점입니다. 예고편에서부터 깜짝 놀라게 만든, 폭격으로 투하되는 포탄으로부터 360° 앵글이 회전해 진주만에 박히는 장면의 멋진 카메라 워킹으로 대변되듯이 ‘진주만’의 전투씬은 매우 화려하며 스케일 또한 웅장합니다. 감독판으로 추가 편집된 몇몇 장면들은 유혈이 낭자하여 가족 영화로서 부적격이며, CG로 도배된 전투 장면이기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촬영된 비슷한 소재의 ‘토라! 토라! 토라!’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볼거리는 ‘진주만’이 더 많습니다. 과거 그 어떤 영화에서 프로펠러기인 P-40와 제로센의 전투 장면을 이처럼 박력 넘치고 화려하게 묘사한 적이 있었던가요.
하지만 이와 같은 미덕을 가진 영화가 실패한 것은 멜러의 과잉 때문입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까지 무려 8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무런 압축 없이 엿가락 늘어지듯 지나치게 장황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그 정서 또한 과거의 한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신파이기 때문에 중반까지의 지루함을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만일 영화에 속도감을 부여하기 위해 멜러 장면을 과감하게 편집하여 3시간 분량을 2시간 30분 정도로 압축하여 개봉했더라면 ‘진주만’은 긴박감 넘치는 전쟁 드라마이자 엔터테인먼트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dvd를 활용해 삭제된 멜러 장면을 심리스 브랜칭으로 재편집하여 판매했으면 어땠을까요.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 것이 바로 ‘진주만’의 아쉬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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