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실히 ‘터미네이터3’는 비판받을 구석이 많습니다. 기계가 나이를 먹는 것도 아닌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분한 터미네이터 T-850 모델 101은 피부가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꽃미남 존 코너는 세파에 찌들린 듯 혹성 탈출 시리즈의 원숭이로 돌변했으며, 뒤질세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꽃띠였던 클레어 데인즈(캐서린 브루스터 역)조차 폭삭 삭아 있었습니다. 쉴 틈 없었던 1, 2편에 비해 3편의 내러티브는 쉬엄쉬엄 간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3’가 진짜로 비판받아야 할 것은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이없는 운명론입니다. 1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동정녀의 구세주 잉태라는 숭고한 주제 의식과 2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가능론적 세계관은 여지 없이 실종된 채 10대 때보다 더 매가리 없어진 존 코너마냥 ‘터미네이터3’에서는 최악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음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인간의 의지 따위는 운명 앞에서는 미약할 뿐이라는 패배 의식이 ‘터미네이터3’의 주제 의식이죠.
주지사님이 ‘터미네이터3’ 이후 나이로 보나 커리어로 보나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기에 부적합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터미네이터4’가 제작된다면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제외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시간적 배경을 핵전쟁 이후로 미뤄 놓으며 자유로운 이야기를 펼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는 점이나 ‘혹성 탈출 2 - 지하 도시의 음모’처럼 관객이 예상치 못한 파멸적 결말로 치달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운명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터미네이터3’의 메시지는 온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터미네이터3’는 그냥 버려두기에는 아까운 작품입니다. 1, 2편의 팬들을 위한 장치가 구석구석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죠. T850이 옷을 구해 입고 선글라스를 쓰는 장면, 명대사 ‘나는 돌아온다’의 변주들, 1편의 카일(마이클 빈 분)과 사라를 연상케하는, 존과 캐서린이 서로를 의지한 채 절룩거리며 뛰는 장면까지 수많은 동인지적 서비스 신으로 가득합니다. T-X로 분한 크리스타나 로켄의 매력도 상당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히로인이었지만 이제는 삭아버린 클레어 데인즈가 크리스타나 로켄과 심하게 비교될 지경이죠. (놀랍게도 둘은 1979년생 동갑입니다!) 터미네이터는 몸으로 때우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는 맨 처음 누드 장면에서부터(이 때문에 4:3 화면비가 지원되는 한정판 dvd를 구입하신 분도 많으실 듯.) 변기에 머리가 처박히는 가학적인 장면에 이르기까지 한 그녀의 캐스팅은 절묘했습니다. 1, 2편에서 남자들이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줘서 바닥이 났으니 이제 여자가 보여줄 차례였으니까요. 특히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비록 CG의 도움을 얻기는 했지만 ‘매트릭스’ 이후 얍삽한 액션이 판을 치는 요즘의 헐리우드에서 무식하리만치 우직하게 때려 부수는 아날로그적 액션으로 일관했다는 점입니다. 총알을 발레 동작마냥 피하는 것이 ‘매트릭스’ 이후의 액션 영화의 흐름이었다면 ‘터미네이터3’는 그 원류인 1980년대의 ‘터미네이터’처럼 총알은 그냥 맞고 버티는 우직함이 돋보였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팬이고 ‘터미네이터3’가 나와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을 비롯해 차포 다 떼고 이 정도면 정말 선전한 셈이죠. ‘터미네이터3’에서 T850이 존에게 던진 마지막 대사인 ‘다시 만나자.’라는 말처럼 이제 느긋하게 ‘터미네이터4’를 기다리렵니다. 언제 시간나면 한글 자막이 지원되는 dvd 본편의 커멘터리를 오징어 땅콩이나 먹으며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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