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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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 – 장국영의 비극적 운명으로 더욱 각별해진 걸작 영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년 데이는 어린이에 경극을 가르치는 양성소에 맡겨집니다. 혹독한 훈련 속에 자라난 데이는 샬로와 함께 경극 ‘패왕별희’의 주인공 우희와 항우를 각각 맡게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여성 배역으로만 육성된 데이(장국영 분)는 샬로(장풍의 분)를 사랑하지만 샬로는 매춘부 주샨(공리 분)과 결혼합니다.

중국 현대사 관통한 경극 배우의 일생

2003년 4월 1일 사망한 장국영의 기일에 맞춰 연례행사와 같이 그의 대표작인 첸 카이거 감독의 1993년 작 ‘패왕별희’가 재개봉되었습니다. 중화민국, 일제 침략, 국공 내전, 공산정부 수립, 문화대혁명까지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관통하는 경극 배우 데이와 샬로의 일생을 묘사합니다.

문화대혁명 때 고난의 세월을 보낸 데이와 샬로가 관객이 없는 텅 빈 체육관에서 11년 만에 ‘패왕별희’를 상연하며 과거를 회상해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년의 성장, 사랑, 섹스, 죽음, 마약 등을 소재로 한 대서사시라는 점에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필적합니다.

1991년 작 영화 ‘황비홍’의 영어 제목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차이나(Once Upon A Time In China)’이지만 그보다는 ‘패왕별희’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차이나’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패왕별희’의 영어 제목은 ‘Farewell My Concubine’입니다.

데이와 샬로, 대조적 캐릭터

서두는 육손이였던 데이가 매춘부인 어머니(장원리 분)에게 손가락이 잘린 뒤 양성소에 맡겨지지만 몇 년간 반복된 스승의 구타와 가혹 행위를 참지 못해 탈출합니다. 하지만 시내에서 관람한 경극에서 그 진정한 매력에 눈뜬 데이는 양성소로 돌아와 배우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생물학적 성은 남자이지만 극 중 역할이 여자라는 점을 헷갈리는 데이의 입에 샬로가 담뱃대를 넣고 마구 헤집는 잔혹한 장면은 오럴 섹스를 연상시킵니다. 이후 데이는 현실과 경극의 경계선을 상실한 채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데이와 샬로는 성격이 대조적입니다. 데이는 경극을 즐긴다면 침략자인 일본군 앞에서도 공연하는 예술 지상주의자입니다. 데이의 삶에는 경극과 사랑하는 샬로 외에는 현실의 삶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 샬로는 시대의 조류에 적당히 편승하며 현실과 경극을 명확히 구분하는 쾌락주의자입니다. 그가 주샨과 충동적으로 약혼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주샨의 등장, 삼각관계 형성

데이가 외부적 강요로 동성애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면 샬로는 일반적인 이성애자입니다. 샬로와 결혼한 주샨에 대한 데이의 질투심은 필연적입니다.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공산 정권이 국공 내전에 승리한 뒤 데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행보로 인해 위기에 처합니다. 결국 경극을 비롯한 전통 예술을 말살하는 문화대혁명에서 데이와 샬로는 홍위병 앞에서 치욕을 당합니다.

샬로가 데이를 고발하자 데이는 복수로 주샨의 매춘부 경력을 폭로합니다. 샬로가 홍위병의 추궁에 못 이겨 주샨과의 이혼을 선언하자 주샨은 목을 매 자살합니다. 샬로와 주샨의 약혼 및 이혼은 모두 샬로의 충동적 판단으로 타인 앞에서 선언한 결과가 됩니다.

데이와 주샨은 삼각관계의 연적처럼 보이지만 주샨을 단순한 악역이자 데이의 대척점이라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아편을 끊기 위해 몸부림치는 데이를 주샨이 끌어안아 주는 장면에서 데이는 무의식적으로 매춘부였던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데이는 매춘부 출신인 어머니와 주샨이 묘하게 겹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샬로를 주샨에 빼앗겼다는 의식을 평생 버리지 못했던 데이의 문화대혁명 때 고발이 주샨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죽음으로 완성된 예술

영화 ‘패왕별희’의 주제의식은 아니지만 양성소의 가혹한 구타와 체벌은 20세기까지 한국에도 잔존했던 교육 현장의 체벌을 떠올리게 합니다. 데이는 어린 시절 스승의 구타에 반발심을 드러냈지만 정작 본인이 스승이 되자 제자 샤오쓰(뢰한 분)를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한계를 노출합니다.

샤오쓰는 홍위병이 되어 샬로와 데이를 고발하지만 정작 본인도 경극의 매력을 포기 못 해 홍위병에 체포됩니다. 경극이 얼마나 치명적 매력을 지닌 예술인지 데이뿐만 아니라 샤오쓰를 통해서도 드러난다고 해석됩니다. 화려한 경극 분장과 의상, 그리고 이국적인 경극 상연 등은 눈이 즐거운 볼거리입니다.

경극 ‘패왕별희’의 결말은 사면초가에 몰린 항우 앞에서 우희가 칼로 자결하는 장면입니다. 타이틀 시퀀스에 그림으로 제시되는 이 극적인 순간은 영화 본편에서는 클라이맥스까지 제시되지 않아 궁금증을 증폭시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우희를 연기하는 데이가 항우를 연기하는 샬로 앞에서 자결하는 장면으로 제시됩니다. 데이는 11년을 기다린 마지막 공연으로 경극 ‘패왕별희’를 완성하며 사랑하는 샬로 앞에서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는 자결 직전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샬로를 바라봅니다. 예술 작품을 죽음과 함께 완성시킨 것입니다.

결말은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1993년 작 ‘M. 버터플라이’와 흡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패왕별희’와 ‘M. 버터플라이’ 모두 동성애 및 연극이 소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패왕별희’와 겹친 장국영의 운명

‘패왕별희’는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며 개봉 당시 이미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2003년 4월 양성애자인 장국영이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뒤 ‘패왕별희’는 더욱 엄청난 무게감을 보유한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패왕별희’의 데이와 장국영이 성적 취향과 배우로서의 엄청난 인기,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까지 완전히 겹쳤기 때문입니다.

장국영 본인도 ‘패왕별희’의 데이를 연기하며 자신과 많은 부분이 닮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스스로 여성으로 인식하며 걸음걸이와 사소한 손짓까지 여성적이었던 데이를 재현한 장국영의 연기는 압도적입니다. ‘패왕별희’는 2시간 50분의 긴 러닝 타임이 이야기와 볼거리가 꽉 들어차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문화대혁명 때 천대했던 경극을 20세기 말 예술로 인정해 되살렸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애국주의를 강조해 대중 예술이 퇴행하는 현시점에 ‘패왕별희’와 같은 영화가 다시 제작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어쩌면 ‘패왕별희’는 시대 상황과 최고의 배우가 만나 어우러져 탄생한 행운의 걸작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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