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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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 스토리 - 모순적 치정 관계, 건조하게 풀어내 영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권태기의 소꿉친구 출신 연인

에드워드 양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1985년 작 ‘타이페이 스토리’가 정식 개봉되었습니다. 에드워드 양과 함께 대만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허우 샤오시엔은 각본에 참여했고 제작을 맡았으며 주연 아룽을 연기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 사이이며 오랜 연인이지만 권태기를 겪는 아룽과 수첸(채금 분)을 묘사합니다.

영어 제목이자 한국 개봉명 ‘Taipei Story’로는 공간적 배경 외에는 유추하기 어렵습니다. 원제 ‘青梅竹馬(청매죽우)’는 ‘소꿉친구’를 뜻하며 한국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죽마고우(竹馬故友)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아룽과 수첸, 그리고 두 사람과 삼각관계를 이루는 이혼녀 관(가소운 분), 아룽의 친구이자 택시 기사 킨(오념진 분)은 모두 어린 시절의 인연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리틀 야구 선수였던 아룽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을 비롯한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대도시 타이페이에서 이들의 관계는 파편화됩니다. 수첸의 동료인 건축가 커(가일정 분)의 대사 “모든 건물이 똑같아진다”는 몰개성화되는 삭막한 대도시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인간관계를 상징합니다.

냉정한 듯 우유부단한 모순적 인물들

등장인물들은 외형적으로는 과묵하며 무표정해 냉정해보이지만 실은 우유부단합니다. 아룽과 수첸은 오랜 연인이지만 키스하기는커녕 손도 제대로 잡지 않습니다. 두 사람만의 달콤한 데이트 장면도 없습니다. 수첸은 아룽을 집으로 부르지만 아룽의 집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아룽이 수첸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룽과 수첸 모두 각각 다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합니다. 아룽은 관과 도쿄에서 며칠을 함께 보냈지만 수첸에게는 거짓말을 합니다. 수첸은 유부남 커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커는 아내와의 소원한 관계를 앞세워 수첸에 가까워지려 합니다. 수첸은 아룽과 관의 만남을 뒤늦게 알고 분노하지만 정작 본인도 전 사장 메이(진숙방 분)에게 커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충고를 받습니다.

아룽도 모순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룽은 킨의 아내(양려음 분)가 도박에 빠져 어려운 살림을 더욱 어렵게 만들자 분노해 도박장에서 그를 강제로 끌어냅니다. 하지만 아룽은 수첸에게 거짓말이 들통 나고 따귀를 얻어맞은 뒤 홧김에 도박을 하다 자신의 승용차를 날립니다.

돈에 뒤엉킨 관계

‘타이페이 스토리’는 돈에 뒤엉킨 인간관계에도 주목합니다. 아룽은 수첸의 아버지(오병남 분)가 사업에 실패하자 그에게 거액을 빌려줍니다. 그로 인해 아룽이 수첸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가려는 꿈은 멀어지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수첸 역시 대출을 받아 어머니(매방 분)에게 전합니다. 수첸은 여동생 아링(임수령 분)의 낙태 자금도 조달합니다. 수첸이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하는 존재가 아링입니다. ‘타이페이 스토리’의 인간관계 및 가족 관계는 서로를 힘들게 만들 뿐입니다.

끝내 피하지 못한 파국


‘치정과 돈’으로 압축되는 ‘타이페이 스토리’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아링의 친구인 폭주족 청년(손붕 분)이 수첸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자 수첸은 아룽에 도움을 청합니다. 아룽은 수첸의 귀가를 돕지만 동침 요구는 거절합니다. 오밤중에 귀가하던 도중 폭주족 청년과 시비가 붙은 아룽은 칼에 찔려 허망하게 죽습니다.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아룽입니다. 따지고 보면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들이 역설적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룽은 수첸의 아버지를 도우려다 돈을 날려 수첸과의 미국행이 물거품이 됩니다. 관에 대한 거짓말이 드러나 수첸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에도 아룽은 수첸을 돕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죽음입니다.

한동안 실직 상태였던 수첸은 일자리를 찾으며 새 출발하는 아침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 아룽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병원에 실려 갑니다. 수첸은 아직 아룽의 부고를 접하지 못한 채 엔딩 크레딧이 시작됩니다.

‘타이페이 스토리’는 대만의 굴곡진 역사를 폭주족들의 쑨원 기념물 주변 질주로 암시합니다. 아룽과 수첸이 꿈꾸는 미국행은 대만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뜻하지만 성사되지 못합니다. 대만의 인력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결말입니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 연상

에드워드 양과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상황 설명이 많지 않고 대사가 적어 관객은 적은 정보로 여백을 메워가야 합니다. 카메라는 정적입니다. 자극적인 오락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건조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진한 여운을 남기며 영화 본편은 물론 관객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전술한 요소들은 물론 불량 청년들의 등장과 치정에 의한 살인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1991년 후속작인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에도 계승됩니다. 커가 아내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수첸이 확인하는 편의점 장면은 1994년 작 ‘중경삼림’에도 비슷하게 연출된 바 있습니다. 양조위가 연기한 경찰 633이 스튜어디스와 그의 새 연인과 조우하는 장면입니다.

1985년의 타이페이의 풍경은 의외로 당시의 서울과 매우 흡사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타이페이 스토리’를 상징하는 주된 공간적 배경 중 하나인 고층빌딩 옥상의 후지필름 대형 네온 광고판은 20세기 후반 필름과 아날로그의 시대를 대변합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 청춘의 우정, 사랑, 배신 묘사한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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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ㅇㅇ 2020/01/02 05:21 # 삭제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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