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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스페인 내전, 설 곳 없는 소녀 영화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소녀 오필리아(이바나 바케로 분)는 임신한 어머니(아리아드나 힐 분)와 함께 의붓아버지 비달 대위(세르기 로페즈 분)가 근무하는 산으로 오게 됩니다. 프랑코 정부의 군인 비달은 산 속에 숨은 공화주의자를 소탕합니다.

비달, 파시즘의 상징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각본, 제작, 연출을 맡은 2006년 작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하 ‘판의 미로’)’가 재개봉되었습니다. 1944년을 스페인을 배경으로 동화를 좋아하는 소녀 오필리아가 좌우 대립의 내전 속에서 희생된다는 줄거리의 염세적 잔혹 동화입니다.

프랑코 파시스트 세력은 공화주의 세력에 승리했지만 패배한 공화주의 세력은 게릴라 활동에 돌입합니다. 프랑코 정부의 군 지휘관 비달은 고문을 자행하는 것은 물론 애꿎은 민간인까지 살해합니다.

오필리아의 어머니 카르멘이 비달을 선택한 이유는 재단사였던 남편의 사망 후 혼자 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비달이 카르멘을 선택한 이유는 아들을 낳아줄 여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비달은 모로코에서 전사한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군인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수컷으로서의 동물적 본능에 충실합니다. 비달의 아버지가 제국주의와 침략을 상징한다면 비달은 파시즘과 학살을 상징합니다. 스페인의 굴곡의 역사를 대변하는 부자입니다.

따라서 카르멘과 비달 사이에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적 조건이 중요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비달의 아이를 가진 카르멘은 임신 중독증에 시달립니다. 비달의 거처인 산 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카르멘은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해 증세가 악화되어 위독해집니다. 건강을 잃는 가운데 카르멘은 뱃속의 아기와 비달에 대해서만 집중할 뿐 오필리아에 대해서는 소홀합니다. 모성으로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소녀가 설 곳 없는 잔혹한 현실

카르멘을 대신하는 인물은 비달의 가정부 메르세데스(마리벨 베르두 분)입니다. 공화주의 게릴라 스파이의 정체를 숨긴 메르세데스는 카르멘의 사후 오필리아를 배려하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카르멘을 대신해 모성을 발휘합니다. 비달과 메르세데스는 폭압적 남성성과 세심한 여성성의 대립 구도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비달에 의한 오필리아 살해를 막지는 못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죽어가는 오필리아를 위해 자장가를 부르는 것뿐입니다.

극중에는 게릴라가 승리하고 비달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프랑코 파시스트 정부를 뒤엎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독재자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정권을 유지합니다.

‘판의 미로’의 결말의 게릴라의 승리는 작은 승리에 불과합니다. 게릴라는 끝내 패했기에 어른들이 만든 잔혹한 현실 속에서 오필리아가 설 땅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필리아는 죽음을 통한 가상 세계로의 복귀라는 비극적 귀결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필리아는 죽음으로서 동화의 나라의 공주로 복귀하며 안식을 찾지만 그 과정도 결코 순탄치는 않습니다. 오필리아의 앞에 나타나는 판은 그를 공주로서 환대하기 보다는 이것저것 지시하고 다그치며 이용하는 듯한 인상마저 남깁니다. 한국 개봉명의 부제는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지만 오필리아가 실제로 손에 넣는 열쇠는 한 개입니다.

‘화니와 알렉산더’의 비극 버전

친부의 사망 뒤 어머니가 파쇼적 의붓아버지와 재혼해 어린이 주인공이 경험하는 갈등이라는 줄거리는 걸작 ‘화니와 알렉산더’를 연상시킵니다. 주인공이 허구의 세계를 탈출구로 삼은 설정,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사이의 새로운 아이의 임신과 탄생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해피엔딩으로 귀결된 ‘화니와 알렉산더’와 달리 ‘판의 미로’는 비극으로 종료됩니다. ‘화니와 알렉산더’는 중세적 유산인 종교에 맞서 가족을 등에 업고 개인적 싸움을 벌이는 현대 소년을 다뤄 승리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판의 미로’는 국가 전체를 집어삼킨 이념 대립과 내전을 소재로 했기에 소녀에게는 생존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타이틀 롤 ‘판의 미로’의 미로는 어린이 주인공이 아버지와 추격전을 벌이는 클라이맥스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샤이닝’의 미로를 연상시킵니다. ‘판의 미로’에서 환각에 사로잡히는 인물이 주인공 오필리아인 반면 ‘샤이닝’에서는 아버지 잭이 환각에 사로잡힙니다. 물론 두 작품의 미로의 추격전의 귀결은 판이합니다.

메르세데스가 비달의 입 속에 칼을 넣어 베어내는 장면은 ‘차이나타운’의 초반 주인공 제이크가 콧속에 칼날이 들어가 베어지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제이크의 코를 베어내는 연기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직접 맡았습니다. 제이크와 비달 모두 남성성에 집착하는 마초 캐릭터입니다.

판은 스페인의 괴물이지만 기괴한 분장은 물론 익살스런 움직임과 대사까지 일본 특촬물의 괴인을 연상시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일본 서브 컬처에 대한 애정은 ‘퍼시픽 림’에서 뚜렷하게 표출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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