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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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섭은낭 - 올바른 판단력 갖춘 개인의 중요성 영화

※ 본 포스팅은 ‘자객 섭은낭’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5세부터 13년 간 자객으로 키워진 은낭(서기 분)은 스승인 여도사(허방의 분)로부터 위박의 절도사 계안(장첸 분)을 암살할 것을 지시받습니다. 은낭은 정혼 상대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계안을 차마 죽이지 못합니다.

대중적 오락 영화 아니다

8세기 말 중국 당대를 배경으로 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은 과거 사랑했던 남자를 죽여야 하는 명령을 받은 여성 자객의 갈등을 묘사하는 무협 영화입니다. 화면비가 4:3이며 작품 제목이 제시되기 전 서두의 장면은 흑백 영상입니다. 흑백 영화,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수묵화에 대한 경의가 드러납니다. 제목이 제시된 뒤에야 쨍한 영상의 컬러로 전환됩니다.

허우 샤오시엔이 오락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은 아닌 만큼 ‘자객 섭은낭’은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대사는 적고 배우들의 대사 발성은 또렷하지 않아 웅얼거리는 듯합니다. 은낭은 자객답게 과묵한 캐릭터입니다. 은낭과 우연히 마주친 뒤 그녀를 돕는 마경 소년 역의 츠마부키 사토시는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중화권 영화에 출연한 일본인 배우에 대한 배려로 보입니다.

장면은 분절적이며 상황 설명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의 숫자는 많은 편인데다 복잡한 혈연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이를 의식한 듯 TV 사극처럼 한글 자막으로 등장인물의 이름과 설명을 덧붙입니다. 관람 전에 극장에서 배부되는 팸플릿 뒷면의 캐릭터 설명을 읽어두면 줄거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협 영화이지만 액션 장면은 길지 않습니다. 은낭과 가면의 검객 정정아(주운 분), 그리고 여도사 가신공주가 모두 초고수라 합을 겨루는 장면이 길지 않습니다. 은낭과 엑스트라의 대결은 한 합으로 압도되어 휙 하고 지나가면 짚단 쓰러지듯 합니다. ‘자객 섭은낭’은 대중적인 오락 영화는 아니라 지루해할 관객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극중에서 무술 고수는 모두 여성이며 남성 등장인물 중 고수는 없습니다. 강인한 여성으로 가득한 영화입니다.

북소리와 안개

계안의 궁내에는 느리지만 둔중한 북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져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언제 위박을 노릴지 모르는 당 중앙 정부, 전쟁을 종용하는 가신들, 그리고 후궁 호희(사흔영 분)를 노리는 본부인 전원씨(주운 분) 등 계안의 불안한 처지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계안은 연회에서 직접 북을 연주하기도 합니다. 실외 장면에 빼놓지 않고 제시되는 안개 역시 은낭과 계안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한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소품은 고증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유로운 해석에 가깝습니다. 정정아의 가면은 중국의 것보다는 유럽 가면무도회의 가면과 유사합니다. 계안의 의상은 조선 왕의 곤룡포를 연상시킵니다. 전원씨와 한패인 주술사 공공아로는 프랑스 출신의 자크 피쿠가 연기해 ‘자객 섭은낭’의 퓨전 사극의 성격을 상징합니다. 계안이 연회에서 호희와 추는 춤은 중국 당대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스승 명령 거부한 은낭

‘자객 섭은낭’의 결말은 독특합니다. 은낭은 계안을 암살하라는 여도사의 명령을 끝내 거부합니다. 여도사는 은낭을 살해하려 하지만 오히려 은낭이 여도사를 검술로 제압합니다.

결말은 초반에 암시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흑백 장면에서 은낭은 여도사의 암살 지시를 이행하지만 컬러로 전환된 뒤에는 아들이 있는 절도사를 살해하지 못합니다. 계안 역시 자식들이 있으며 과거 은낭이 사랑했던 남자입니다. 흑백 영상에서 컬러 영상으로의 전환은 살인에 무감각했던 은낭이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기 시작했다는 암시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조직 혹은 상관의 살인 명령을 거부하는 주인공은 영화에 흔히 등장합니다. 그럴 경우 조직 혹은 상관에 의해 주인공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은 무협 영화는 물론 느와르 영화에서도 전형적입니다. 하지만 ‘자객 섭은낭’에서 은낭은 마경 소년과 함께 당을 떠나 신라로 향합니다. 계안 및 가족과의 이별이 아쉽지만 동시에 여도사와도 이별해 은낭이 새로운 삶을 새로운 인연과 출발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평범한 영화였다면 은낭은 물론 계안마저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허우 샤오시엔은 전형적 결말을 탈피했습니다.

운명을 거스른 은낭에 대한 해피 엔딩은 ‘자객 섭은낭’의 주제의식을 함축합니다. 조직 혹은 상관에 충실한 인간은 일반적으로 책임감이 뛰어난 긍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명령에 충실한 인간이 곧 훌륭한 인간은 아닐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가 인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이유는 명령에 충실한 인간이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조직과 상관의 명령에 충실했으며 주체적 개인으로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학살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명령에 충실했다고 하지만 명령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는 의문을 품고 행동에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허우 샤오시엔은 주체적 판단을 통해 살인을 거부하는 주인공 은낭을 통해 집단 혹은 상관의 명령을 방패삼아 살인과 악행을 저질러 온 인간과 그들이 만든 역사를 비판합니다. 21세기는 조직 논리보다 개인의 판단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밀레니엄 맘보 - 허우 샤오시엔의 ‘아비정전’
카페 뤼미에르 - 속 깊은 이들의 고즈넉한 일상
빨간 풍선 - 집착을 버리고 관조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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