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팅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절멸시키는 컴퓨터 스카이넷에 맞서는 저항군 지도자 존 코너(제이슨 클라크 분)에 의해 카일 리스(제이 코트니 분)가 서기 2029년으로부터 1984년으로 보내집니다. 리스는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 분)를 터미네이터로부터 구하려 하지만 이미 사라의 곁에는 터미네이터 ‘팝스(아놀드 슈왈제네거 분)’가 지키고 있습니다. 리스는 과거가 뒤바뀐 사실에 당혹스러워 합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의미
‘토르 다크 월드’의 앨런 테일러 감독이 연출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4편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리부트를 위해 탄생한 후속편입니다. 제목의 ‘제니시스(Genisys)’는 기원’을 의미하는 ‘Genesis’에 가까워 극중에서 2017년 스카이넷으로 탄생하게 되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가리킴과 동시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신기원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카이넷의 근원 제니시스는 PC, 스마트폰, 태블릿 등에서 널리 사용하는 운영체제로 설정되었습니다.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가 냉전의 부산물인 핵무기를 공포의 대상으로 설정해 20세기 후반의 시대상을 반영했다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핵무기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지만 컴퓨터 바이러스가 두려운 21세기의 시대상을 반영했습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익숙한 요소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4편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기본 요소들에 충실합니다. 우선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얼굴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1947년생인 그가 60대 후반의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만큼 터미네이터 T-800의 인공 피부도 시간이 지나면 노화된다는 설정을 덧붙여 설득력을 확보합니다. 사라로 출연한 에밀리아 클라크의 극중 이미지는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에서 사라 역을 맡았던 린다 해밀턴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선이 굵고 남성적인 린다 해밀턴에 비해 에밀리아 클라크가 보다 여성적이며 귀여운 외모입니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T-1000과의 대결에서 팝스 T-800의 기계로 된 오른팔이 노출되는 장면은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에서 반복된 것입니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T-1000은 경찰로 신분을 위장했으며 길쭉한 얼굴형에 차가운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터미네이터 2’에서 로버트 패트릭이 연기한 T-1000과 흡사합니다.
2029년의 스카이넷이 1984년의 사라를 살해하기 위해 보낸 T-800이 1984년 LA의 뒷골목에 도착하는 장면과 불량배들과 시비를 붙는 장면은 ‘터미네이터’의 연출을 답습했습니다. T-800의 뒤를 쫓아온 리스가 노숙자 앞에 알몸으로 등장한 뒤 상점에서 옷을 훔치고 운동화를 신는 장면의 연출도 ‘터미네이터’와 동일합니다.
리스를 T-1000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사라가 차량을 몰고 나타나 ‘지금이야, 병사!(Now, soldier!’)를 외치는 대사는 ‘터미네이터’의 클라이맥스에서 기진맥진한 리스를 사라가 끌어올리며 엔도 스켈리톤으로부터 도망칠 것을 재촉하는 대사를 되풀이한 것입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최고의 명대사 ‘돌아오겠다(I'll be back)’는 예고편에 공개된 바와 같이 헬기를 향해 팝스가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재활용됩니다. 이 장면에 삽입되는 배경 음악은 너무도 유명한 브래드 피델의 ‘터미네이터’ 메인 테마입니다. 이 곡은 엔딩 크레딧이 시작될 때 다시 삽입됩니다. 1987년 발표된 이너 서클의 ‘Bad Boys’가 사라 일행이 경찰에 체포되어 프로필 사진을 촬영할 때 활용되어 19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터미네이터 2’에서 스카이넷을 개발하게 되는 천재 과학자 다이슨과 그의 아들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배우 캐스팅은 바뀌었지만 캐릭터로는 나이를 먹은 채 등장합니다. 각각 선역과 악역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사라와 팝스 일행을 돕는 연로한 형사 오브라이언(J. K. 시몬스 분)은 ‘터미네이터’부터 ‘터미네이터 3’까지 터미네이터의 산 증인으로 등장했던 실버만 박사의 변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존 요소의 비틀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특유의 시리즈 비틀기도 엿볼 수 있습니다. ‘터미네이터’에서 1984년 리스를 만나기 전의 사라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존의 대사에 언급되는 바와 같이 스카이넷이나 터미네이터를 전혀 모르는 평범한 웨이트리스였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1984년의 사라는 팝스와 함께 지내며 스카이넷은 물론 리스의 존재까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리스와 자신의 사이에서 아들 존이 탄생하리라는 것도 그녀에게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팝스의 존재로 인해 사라는 이미 여전사로 키워졌습니다. 팝스와 사라의 유사 부녀 관계는 ‘터미네이터 2’의 T-800과 존의 유사 부자 관계를 연상시킵니다. 사라의 명령으로 팝스가 인간을 살해하지 않는 행동 양식은 ‘터미네이터 2’에서 존의 명령으로 T-800이 인간을 살해하지 행동 양식과 동일합니다.
반면 리스는 자신과 사라의 사이에서 존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스카이넷에 의해 터미네이터가 된 존이 리스의 앞에 나타나 “너는 나의 아버지다(You are my father)”라고 밝히는 대사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에서 다스 베이더가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나는 너의 아버지다(I am your father)”라고 밝힌 대사의 패러디로 읽힙니다.
존이 나노 입자로 구성된 최신형 터미네이터 T-3000이라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터미네이터가 존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존이 터미네이터가 되어 부모인 리스와 사라를 뒤쫓기에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기묘한 의미의 가족 영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존이 터미네이터라는 사실이 이미 공개되어 정작 본편에서는 김이 빠집니다.
2017년의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존이 리스와 사라 앞에 출연하자 뒤늦게 나타난 팝스가 리스와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존을 저격합니다. 사라는 아들이 죽었다며 분노합니다. 그런데 사라의 부모가 그녀가 9살인 1973년 T-1000에 의해 살해되며 사라와 팝스가 행동을 함께 한 이래 인간을 해치지 말라는 사라의 명령을 팝스가 어긴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라는 팝스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존이 인간이 아닌 터미네이터임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사라 역의 에밀리아 클라크와 존 역의 제이슨 클라크는 실제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모자 관계를 연기한 두 배우의 성이 클라크(Clarke)로 일치하는 것은 이채롭습니다. 제이슨 클라크는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혹성 탈출 반격의 서막’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또한 샌프란시스코를 주된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혹성 탈출’과 ‘터미네이터’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SF 영화라는 점도 동일합니다.
로맨틱 코미디가 된 ‘터미네이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는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에 크게 뒤집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각본 집필 능력과 연출력을 따라잡을 수 있는 감독은 역시 드뭅니다. 액션의 힘을 놓고 봐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터미네이터 3’만도 못합니다. ‘터미네이터 3’는 앞선 두 편의 힘 있는 아날로그 액션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라도 엿보이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CG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습니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아놀드 슈왈제네거마냥 힘이 없습니다. 1980년대의 프랜차이즈를 압도적으로 되살린 최근작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비하면 액션의 힘이 크게 떨어집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특유의 비장미도 사라졌습니다. 리스 역의 제이 코트니는 미스 캐스팅입니다. ‘터미네이터’’의 리스를 연기했던 마이클 빈은 우수에 젖은 눈빛을 바탕으로 보호본능을 자극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리스가 사라를 지키기 위해 거구의 터미네이터에 홀로 맞서는 연출은 약자로서의 비장미를 강조하는 느와르의 요소마저 갖췄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제이 코트니는 어리숙해 보이는 이미지의 근육질 배우라 마이클 빈과는 이미지가 확연히 이질적입니다. 보호 본능을 전혀 자극하지 못합니다.
사라를 보호하는 팝스는 묘령의 딸을 보호하는 늙은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팝스와 사라, 그리고 리스의 관계를 통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무서운 아버지를 둔 딸과 그녀를 사랑하는 바보 같은 남성의 알콩달콩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 벤 스틸러 주연의 2000년 작 ‘미트 페어렌츠’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라와 리스의 사이는 연인으로 발전하기 전입니다. 두 사람이 1984년의 LA에서 2017년의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기 위해 타임머신에 몸을 맡기며 알몸으로 껴안는 장면은 섹스를 연상시키며 두 사람이 차후 친밀해질 것으로 암시합니다. 하지만 결말 직전까지 둘은 서로 간을 볼 뿐입니다.
후속편 남았다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삼부작의 첫 번째 영화로 예고되어 예정대로라면 두 편의 후속편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결말에 팝스가 T-1000으로 진화한 것과 더불어 엔딩 크레딧 도중에 스카이넷의 생존을 암시하는 추가 장면이 삽입된 것은 후속편을 위한 포석입니다. 누가 언제 팝스와 T-1000을 1973년으로 보냈는지, 그리고 이병현이 연기했지만 대사가 거의 없는 T-1000을 1984년으로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후속편을 위해 아껴 둔 탓인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단 한 편으로 복잡하게 꼬인 ‘엑스맨 시리즈’의 타임라인을 깔끔하게 정리하면서도 후속 시리즈를 예약한 역량에 비하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삼부작 중 한 편만 놓고 보면 역시나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만도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터미네이터 - 사반세기가 지나도 유효한 걸작
터미네이터 2 - 액션이 아니라 인간미
터미네이터 3 - 어이 없는 운명론과 아날로그 액션의 부조화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 크리스찬 베일도 터미네이터를 구할 수 없었다
토르 다크 월드 - 로키, 카리스마로 지배하다
http://twitter.com/tominodijeh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의미
‘토르 다크 월드’의 앨런 테일러 감독이 연출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4편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리부트를 위해 탄생한 후속편입니다. 제목의 ‘제니시스(Genisys)’는 기원’을 의미하는 ‘Genesis’에 가까워 극중에서 2017년 스카이넷으로 탄생하게 되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가리킴과 동시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신기원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카이넷의 근원 제니시스는 PC, 스마트폰, 태블릿 등에서 널리 사용하는 운영체제로 설정되었습니다.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가 냉전의 부산물인 핵무기를 공포의 대상으로 설정해 20세기 후반의 시대상을 반영했다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핵무기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지만 컴퓨터 바이러스가 두려운 21세기의 시대상을 반영했습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익숙한 요소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4편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기본 요소들에 충실합니다. 우선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얼굴인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1947년생인 그가 60대 후반의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만큼 터미네이터 T-800의 인공 피부도 시간이 지나면 노화된다는 설정을 덧붙여 설득력을 확보합니다. 사라로 출연한 에밀리아 클라크의 극중 이미지는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에서 사라 역을 맡았던 린다 해밀턴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선이 굵고 남성적인 린다 해밀턴에 비해 에밀리아 클라크가 보다 여성적이며 귀여운 외모입니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T-1000과의 대결에서 팝스 T-800의 기계로 된 오른팔이 노출되는 장면은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에서 반복된 것입니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T-1000은 경찰로 신분을 위장했으며 길쭉한 얼굴형에 차가운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터미네이터 2’에서 로버트 패트릭이 연기한 T-1000과 흡사합니다.
2029년의 스카이넷이 1984년의 사라를 살해하기 위해 보낸 T-800이 1984년 LA의 뒷골목에 도착하는 장면과 불량배들과 시비를 붙는 장면은 ‘터미네이터’의 연출을 답습했습니다. T-800의 뒤를 쫓아온 리스가 노숙자 앞에 알몸으로 등장한 뒤 상점에서 옷을 훔치고 운동화를 신는 장면의 연출도 ‘터미네이터’와 동일합니다.
리스를 T-1000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사라가 차량을 몰고 나타나 ‘지금이야, 병사!(Now, soldier!’)를 외치는 대사는 ‘터미네이터’의 클라이맥스에서 기진맥진한 리스를 사라가 끌어올리며 엔도 스켈리톤으로부터 도망칠 것을 재촉하는 대사를 되풀이한 것입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최고의 명대사 ‘돌아오겠다(I'll be back)’는 예고편에 공개된 바와 같이 헬기를 향해 팝스가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재활용됩니다. 이 장면에 삽입되는 배경 음악은 너무도 유명한 브래드 피델의 ‘터미네이터’ 메인 테마입니다. 이 곡은 엔딩 크레딧이 시작될 때 다시 삽입됩니다. 1987년 발표된 이너 서클의 ‘Bad Boys’가 사라 일행이 경찰에 체포되어 프로필 사진을 촬영할 때 활용되어 19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터미네이터 2’에서 스카이넷을 개발하게 되는 천재 과학자 다이슨과 그의 아들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배우 캐스팅은 바뀌었지만 캐릭터로는 나이를 먹은 채 등장합니다. 각각 선역과 악역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사라와 팝스 일행을 돕는 연로한 형사 오브라이언(J. K. 시몬스 분)은 ‘터미네이터’부터 ‘터미네이터 3’까지 터미네이터의 산 증인으로 등장했던 실버만 박사의 변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존 요소의 비틀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특유의 시리즈 비틀기도 엿볼 수 있습니다. ‘터미네이터’에서 1984년 리스를 만나기 전의 사라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존의 대사에 언급되는 바와 같이 스카이넷이나 터미네이터를 전혀 모르는 평범한 웨이트리스였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1984년의 사라는 팝스와 함께 지내며 스카이넷은 물론 리스의 존재까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리스와 자신의 사이에서 아들 존이 탄생하리라는 것도 그녀에게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팝스의 존재로 인해 사라는 이미 여전사로 키워졌습니다. 팝스와 사라의 유사 부녀 관계는 ‘터미네이터 2’의 T-800과 존의 유사 부자 관계를 연상시킵니다. 사라의 명령으로 팝스가 인간을 살해하지 않는 행동 양식은 ‘터미네이터 2’에서 존의 명령으로 T-800이 인간을 살해하지 행동 양식과 동일합니다.
반면 리스는 자신과 사라의 사이에서 존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스카이넷에 의해 터미네이터가 된 존이 리스의 앞에 나타나 “너는 나의 아버지다(You are my father)”라고 밝히는 대사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에서 다스 베이더가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나는 너의 아버지다(I am your father)”라고 밝힌 대사의 패러디로 읽힙니다.
존이 나노 입자로 구성된 최신형 터미네이터 T-3000이라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터미네이터가 존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존이 터미네이터가 되어 부모인 리스와 사라를 뒤쫓기에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기묘한 의미의 가족 영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존이 터미네이터라는 사실이 이미 공개되어 정작 본편에서는 김이 빠집니다.
2017년의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존이 리스와 사라 앞에 출연하자 뒤늦게 나타난 팝스가 리스와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존을 저격합니다. 사라는 아들이 죽었다며 분노합니다. 그런데 사라의 부모가 그녀가 9살인 1973년 T-1000에 의해 살해되며 사라와 팝스가 행동을 함께 한 이래 인간을 해치지 말라는 사라의 명령을 팝스가 어긴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라는 팝스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존이 인간이 아닌 터미네이터임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사라 역의 에밀리아 클라크와 존 역의 제이슨 클라크는 실제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모자 관계를 연기한 두 배우의 성이 클라크(Clarke)로 일치하는 것은 이채롭습니다. 제이슨 클라크는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혹성 탈출 반격의 서막’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또한 샌프란시스코를 주된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혹성 탈출’과 ‘터미네이터’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SF 영화라는 점도 동일합니다.
로맨틱 코미디가 된 ‘터미네이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는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에 크게 뒤집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각본 집필 능력과 연출력을 따라잡을 수 있는 감독은 역시 드뭅니다. 액션의 힘을 놓고 봐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터미네이터 3’만도 못합니다. ‘터미네이터 3’는 앞선 두 편의 힘 있는 아날로그 액션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라도 엿보이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CG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습니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아놀드 슈왈제네거마냥 힘이 없습니다. 1980년대의 프랜차이즈를 압도적으로 되살린 최근작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 비하면 액션의 힘이 크게 떨어집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특유의 비장미도 사라졌습니다. 리스 역의 제이 코트니는 미스 캐스팅입니다. ‘터미네이터’’의 리스를 연기했던 마이클 빈은 우수에 젖은 눈빛을 바탕으로 보호본능을 자극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리스가 사라를 지키기 위해 거구의 터미네이터에 홀로 맞서는 연출은 약자로서의 비장미를 강조하는 느와르의 요소마저 갖췄습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제이 코트니는 어리숙해 보이는 이미지의 근육질 배우라 마이클 빈과는 이미지가 확연히 이질적입니다. 보호 본능을 전혀 자극하지 못합니다.
사라를 보호하는 팝스는 묘령의 딸을 보호하는 늙은 아버지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팝스와 사라, 그리고 리스의 관계를 통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무서운 아버지를 둔 딸과 그녀를 사랑하는 바보 같은 남성의 알콩달콩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 벤 스틸러 주연의 2000년 작 ‘미트 페어렌츠’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라와 리스의 사이는 연인으로 발전하기 전입니다. 두 사람이 1984년의 LA에서 2017년의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기 위해 타임머신에 몸을 맡기며 알몸으로 껴안는 장면은 섹스를 연상시키며 두 사람이 차후 친밀해질 것으로 암시합니다. 하지만 결말 직전까지 둘은 서로 간을 볼 뿐입니다.
후속편 남았다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삼부작의 첫 번째 영화로 예고되어 예정대로라면 두 편의 후속편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결말에 팝스가 T-1000으로 진화한 것과 더불어 엔딩 크레딧 도중에 스카이넷의 생존을 암시하는 추가 장면이 삽입된 것은 후속편을 위한 포석입니다. 누가 언제 팝스와 T-1000을 1973년으로 보냈는지, 그리고 이병현이 연기했지만 대사가 거의 없는 T-1000을 1984년으로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후속편을 위해 아껴 둔 탓인지 제대로 규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단 한 편으로 복잡하게 꼬인 ‘엑스맨 시리즈’의 타임라인을 깔끔하게 정리하면서도 후속 시리즈를 예약한 역량에 비하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삼부작 중 한 편만 놓고 보면 역시나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만도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터미네이터 - 사반세기가 지나도 유효한 걸작
터미네이터 2 - 액션이 아니라 인간미
터미네이터 3 - 어이 없는 운명론과 아날로그 액션의 부조화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 크리스찬 베일도 터미네이터를 구할 수 없었다
토르 다크 월드 - 로키, 카리스마로 지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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