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 발매된 리마스터링 dvd를 구입하게 된 것은 저보다는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가족을 이끌고 극장에 가자고 했던 것도 어머니셨고 그때도 이미 과거에 몇 번 개봉된 작품을 다시 보셨던 것이었습니다. 다음 달에 수원의 본가에 부모님을 위해 홈씨어터를 놓아 드리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시스템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시연하려고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플레이어에 dvd를 걸고 졸릴 때까지만 보고 자야겠다 싶었는데, 웬걸요.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인 줄 미쳐 몰랐던 겁니다. 2장짜리 본편 dvd를 쉴 새 없이 돌려보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 정도로 몰입했습니다.
리마스터링 과정을 거치면서 CG가 추가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화려한 색감과 어마어마한 스케일, 다양한 건축물과 세트의 등장으로 우선 눈이 즐거웠습니다. 영화가 제작된 1939년이면 우리 나라는 일제 치하였는데 이때 이만한 스케일의 블록 버스터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어지간한 스케일과 CG의 블록 버스터에 길들여진 지금 감상해도 그 스케일이 놀라우니 블록 버스터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이 영화를 본 사람들(젊은 시절의 어머니와 같은 세대)이 압도당하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어린 시절에 졸다가 잠깐 깨어나 보았던 장면 중 하나가 마차를 타고 가던 주인공의 뒤쪽으로 건물이 불타서 허물어지는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만큼은 강렬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은 또 하나의 장면은 술에 취한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 분)가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스칼렛과 레트의 의상과 헤어 스타일이 세월을 거치며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더군요. 그리고 이 작품의 것인 줄도 모른 채 그 동안 들어와 귀에 익었던 메인 테마와 여러 차례 변주되는 미국의 민요들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걸작으로 만든 것은 캐릭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며 변덕스런 스칼렛과 그녀의 곁을 맴돌며 끊임 없이 어긋나는 매력남 레트의 몇 십년에 걸친 이야기가 빠르게 압축되어 흘러가기 때문에 지루해할 틈이 없었습니다. 특히 무정부적이면서 닳고 닳은 듯한 레트로 분한 클라크 게이블은 남자인 제가 보아도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극중에서 등장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더군요. 왜 크레딧에서 비비안 리보다 먼저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더군요.) 비비안 리는 초반부에 물정 모르던 시절에서는 조금 짜증이 났지만 전쟁을 겪으며 자신의 힘으로 집안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성숙해지자 확실히 예뻐보이더군요. 물론 개인적으로 스칼렛과 같은 타입의 여자는 결혼은커녕 사귀는 것도 피할 것 같습니다만 말입니다.
끝으로 다소 의문스러웠던 것은 남북전쟁에 관한 영화(혹은 원작 소설)의 시각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사를 잘 몰라서 그렇지만, 노예 해방을 원했던 북부가 노예 제도 유지를 주장했던 남부보다 정의롭다고 알고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북부(양키)는 야만적이고 문명을 파괴한다는 시각으로 보고 있으며, 흑인 노예 해방에 관해서도 왠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글을 읽어 본 적은 없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과연 이데올로기적으로 건전한 작품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