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09일
주홍글씨 - 봉건적 주제 의식, 헐거운 내러터브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고르는 능력이 있다는 판단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감독이나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고 그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는 무조건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0년대 한국 영화의 침체기에 혼자 한국 영화계를 이끌다시피했던 한석규의 출연작 중에는 재미 뿐만 아니라 작품성으로 평가받을만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초록물고기’나 ‘넘버3’같은 작품들 말입니다.그러나 ‘텔미 썸딩’이나 ‘이중 간첩’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특히 한참 동안의 공백기를 두고 출연한 ‘이중 간첩’은 과거의 한석규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흥행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성 면에서도 냉정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한석규에게는 거만하다, 소규모 언론사를 무시한다, 인터뷰하기 힘들다, 매니저인 친형의 입김이 너무 세다, 는 등의 뒷말이 무성했습니다. ‘소금 인형’이 엎어졌고 이러다 한석규의 배우로서의 생명력도 엎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오고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절치부심 끝에 ‘주홍글씨’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전히 불만스럽습니다.
한석규라는 배우보다 영화 자체에 초점을 맞춰보면, 우선 김영하의 두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애써 증명이라도 하듯 두 에피소드, 즉 기훈(한석규 분) - 가희(이은주 분) - 수현(엄지원 분)을 둘러싼 에피소드와 경희(성현아 분)의 에피소드가 따로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두 에피소드가 언젠가는 연결되며 쓸만한 반전을 제시하고 꽉 짜인 내러티브로 완성될 것이라는 예상은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언젠가 두 에피소드가 연결될 것을 예상한 관객을 속이며 끝까지 연결시키지 않는 것도 일종의 반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러티브의 헐거움과 구멍은 영화가 끝난 뒤 허무함으로 남았습니다.
반전이라고 제시되는 것도 뜬금없습니다. 사전에 아무런 암시도 제시하지 않은 채 억지스럽고 갑작스럽게 제시되는 반전인데다가 그 반전도 주인공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여지껏 뒤통수를 쳐왔던 등장인물이 고백하는 형식이라 반전의 질적 수준도 낮은 편입니다. 극중의 반전을 주인공이 어렵사리 알아내는 것이 스릴러의 기본 구조인데 형사라는 주인공 기훈이 그런 것조차 알아내려 하지 않으려는 무관심한 자세에 영화는 김빠진 맥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연출도 그렇습니다. 후반부의 트렁크 장면은 지나치게 길게 편집되어 짜증과 불쾌함을 유발합니다. 특히 높은 톤의 목소리를 낼 경우 치명적으로 이상한 목소리(‘베이비 보이스’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가 나오는 이은주가 그 장면에서 대사가 너무 많아 더욱 짜증스러웠습니다. (배우로서의 이은주를 흠잡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상당한 수위의 노출 장면과 러브씬이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런대로 소화했고 영화 속 세 여배우 중에 가장 예뻤으니까요. 특히 노래부르는 장면이나 피아노, 발레 장면은 의외로 매끄럽게 소화하더군요. ‘번지 점프를 하다’ 이후 눈여겨 본 여배우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은 밋밋한 주제 의식 때문일 것입니다. ‘어긋난 사랑에는 대가가 따른다’, 는 것이 주제라고 팜플렛에 명시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21세기에 봉건적 주제인 권선징악을 주장하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보여줄 것 다 보여주고 나서, ‘너희들 이렇게 살면 안돼’라는 것도 우습더군요. 감독이 의외로 소아적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던 것일까요.
배우 한석규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초심인 것 같습니다. MBC 성우로 출발해서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다가 ‘서울의 달’에서 대박을 터뜨린 이후 영화로 진출한 그 당시의 초심 말입니다. 그의 연기는 여전히 훌륭하기는 하지만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먹으면 식상하듯이 그의 연기도 조금씩 식상하게 되는 군요. 차라리 제대로 된 시나리오로 무장한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거나 안성기처럼 조연으로 변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자칫 한석규가 영화를 고르는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관객들은 냉정히 등을 돌리고 말 것입니다. 1990년대 한석규가 독주하던 시절, 한석규의 영화는 흥행이 보장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공백 기간 동안 한국 영화는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의 트로이카 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이제 관객들은 한석규가 없어도 한국 영화는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공백기 이후 설자리가 사라진 박중훈의 예는 한석규에게 반면교사가 될 것입니다.
# by | 2004/11/09 15:46 | 영화 | 트랙백(2)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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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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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내서 트랙백걸어놓고 갑니다 :)
p.s. 후반부의 트렁크 장면은 지나치게 길게 편집되어 짜증과 불쾌함을 유발합니다
라는 문장에 100% 동감.+ㅁ+!
닥터지킬님/ 자신의 영화의 주제의식에 대한 의문과 검토보다는 지나친 자신이 앞섰나 봅니다.
그리고 요번 작품 주홍글씨는 ^^;;
but 오늘 신문에 보니 주홍글씨가 대박이라고..ㅡㅡ;;;
자화자찬하는건지 그만큼 많이 보고나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은건지....ㅎㅎㅎ
crime90님/ 주홍글씨가 어느 정도는 흥행이 되겠지만 그 뒷심은 별달이 강하지 않을 겁니다. 극장에서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짜증을 내면서 나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