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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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 - 인생유전, 진실하며 엄숙하다 영화

※ 본 포스팅은 ‘보이후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편(에단 호크 분)과 이혼하고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 분)와 매디슨(엘라 콜트레인 분) 남매를 홀로 키우던 올리비아(패트리샤 아퀘트 분)는 학업을 재개하고 싶어 이사합니다. 올리비아는 대학교수 빌(마르코 파렐라 분)과 재혼하지만 매디슨은 알코올 중독자인 의붓아버지를 싫어합니다. 사춘기를 겪으며 매디슨은 차츰 내성적이고 우울한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12년 세월, 외모의 변화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 6살 소년이 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햇수로 12년의 세월을 묘사하는 서사시입니다. 일반적인 상업 영화들이 동일 캐릭터를 연령대에 따라 배우를 구분해 캐스팅하는 것과 달리 ‘보이후드’는 동일한 배우들로 12년 동안 꾸준히 촬영한 놀라운 인고의 결과물입니다.

12년 동안 동일한 배우들로 촬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감독과의 개인적 관계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사만다 역의 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딸입니다.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딸의 홈 비디오를 촬영하는 마음가짐으로 촬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남매의 아버지로 ‘비포 선라이즈’를 비롯한 ‘비포’ 삼부작의 주연을 맡았던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페르소나이자 절친한 사이인 에단 호크가 캐스팅되었습니다.

아역 배우들의 성장은 우선 외모가 두드러집니다. 첫 장면에서 키가 거의 비슷했던 매디슨과 사만다는 휴스턴 대학 근처로 이사한 뒤 사만다가 매디슨보다 키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가 전개될수록 두 아역 배우가 살이 찌고 빠지며 머리모양이 바뀌고 팔다리가 길어지는 체형 변화가 눈에 띕니다. 주인공 매디슨은 변성기가 지나 목소리가 굵어지고 수염이 거뭇거뭇해지며 피부가 거칠어집니다. 소년에서 성인이 된 것입니다.

성인 배우들의 외모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 배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패트리샤 아퀘트는 섹시한 여배우의 이미지가 남아있었던 30대 중반의 젊은 어머니로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 영화 후반에는 40대 후반의 후덕한 아줌마로 변모합니다. 분장, CG, 캐스팅 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세월의 세례를 온몸으로 받은 배우들의 외모 변화로 인해 ‘보이후드’는 수공업적 다큐멘터리와 같은 진실성과 엄숙함마저 지니고 있습니다.

매디슨 모자의 인생유전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외모의 변화이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정신적 성장입니다. 매디슨은 어린 시절 ‘드래곤볼’을 좋아하고 게임을 즐겼지만 카메라를 선물 받은 후 사진에 몰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입상 경력을 바탕으로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게 됩니다. 매디슨의 예술가적 기질은 특별한 직업은 없었지만 비틀즈를 비롯한 음악을 사랑하고 규율에 얽매이기 싫어했던 보헤미안 아버지로부터, 진지하며 지적인 측면은 만학으로 대학 교수가 된 어머니로부터 반반 씩 물려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독한 예술가와 같은 남자 주인공은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영화의 전형적 캐릭터입니다. 반면 대학교수와 참전군인 출신인 매디슨의 2명의 의붓아버지는 규율을 강조하는데 알코올 중독자이며 자신의 사고방식을 의붓자식에 강요하는 부정적 인물상입니다.

매디슨 다음으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누나 사만다가 아닙니다. 가장 극적인 인생유전의 주인공인 어머니 올리비아입니다. 그녀의 변화무쌍한 삶은 ‘보이후드’를 끌고 가는 또 다른 힘입니다.

두 아이를 키우며 공부를 병행했던 올리비아는 결국 교수가 됩니다. 빌과 재혼하게 된 것도 그의 인품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의 직업이었던 대학교수에 대한 선망이 반영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극중에서 올리비아는 세 번의 이혼을 경험하고 홀로 남는데 패트리샤 아퀘트 또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 토마스 제인과 결혼한 뒤 이혼한 경험이 있습니다. 배우 본인의 경험이 연기에 녹아들어간 듯 보입니다. 매디슨이 친구가 많지 않고 내성적인 성격이 된 것도 올리비아가 이사와 이혼을 반복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매디슨의 고교 시절 여자 친구 시나 역의 조 그레이엄이 젊은 시절 패트리샤 아퀘트를 닮은 것은 매디슨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암시하는 의도적 캐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올리비아는 매디슨이 대학 입학을 위해 집을 떠나자 “남은 것은 (본인의) 장례식뿐”이라며 우울해합니다. 그토록 원하는 사회적 성취를 이뤘지만 허무감에 빠진 것입니다. 올리비아의 우울을 부추기는 것은 리먼 쇼크로 인해 큰 단독주택을 팔고 작은 아파트 한 채만이 남았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 인생은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장례식’을 언급하는 것은 극중에 사망하는 중요 인물이 없어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영화에는 필수 요소인 ‘죽음’을 보완하기 위한 연출 의도로 해석됩니다.

반면 매디슨은 대학에 진학해 새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사랑과 만나게 됩니다. 매디슨의 창창한 인생은 20대의 개막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올리비아의 내리막과 매디슨의 청춘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보이후드’는 단순히 소년의 성장 영화가 아니라 미국의 현대 가족을 진솔하게 조명한 서사시라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비포’ 삼부작과의 연관성

매디슨의 청춘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도 대학을 졸업하고 누군가를 만나 아이를 낳고 늙어갈 것입니다. 매디슨의 후일담이 곧 ‘비포’ 삼부작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대학 시절 유럽 배낭여행에서 새로운 사랑과 운명적으로 만나는 과정이 ‘비포 선라이즈’, 9년 뒤 유명 작가가 되어 그녀와 재회하는 과정이 ‘비포 선셋’ 그리고 재회로부터 8년 뒤 그녀와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고 일상을 영위하며 늙어가는 과정이 ‘비포 미드나잇’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혹은 ‘비포’ 삼부작의 주인공 제시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을 매디슨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후드’에서 매디슨이 니콜(제시 메클러 분)과 처음 만난 날 나눈 해질녘 대화는 새로운 사랑을 암시합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우연히 하루를 함께 보낸 두 남녀 주인공의 시적인 대화를 연상시킵니다. 즉 ‘보이후드’는 ‘비포’ 삼부작의 시퀄, 혹은 프리퀄 어느 쪽에 위치시켜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보이후드’와 ‘비포’ 삼부작을 묶어 한 남자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사부작으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미국적인 삶

‘보이후드’는 보편적 소재인 가족을 다루지만 매우 미국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의 파티는 중요한 소재입니다. 어머니는 파티가 계기가 되어 수강생 짐(브래드 호킨스 분)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끝에 결혼합니다. 어머니는 수강생 시절 담당 교수였던 빌과 결혼했는데 자신이 대학교수가 된 뒤에는 수강생과 결혼합니다. 이혼한 아버지가 틈을 내 자식들과 캠핑을 떠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반복 제시됩니다. 파티와 캠핑은 미국인들의 여가 중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버지가 두 아이와 함께 메이저리그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실제 경기를 관전하는 장면에서는 시대를 풍미했던 에이스 로저 클레멘스가 선발 등판하며 지금은 투수로 전업한 제이슨 레인이 3점 홈런을 터뜨리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딸까지 가세해 미식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장면도 있습니다. 야구와 미식축구는 미국적인 스포츠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혼 뒤에도 자식을 매개로 나름의 인연을 이어나가는 전 부부들입니다. 매디슨의 고교 졸업 축하 파티에 아버지가 새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대동하고 나타나 넓은 범주의 대가족을 형성하는 것은 다분히 미국적입니다. 한국과는 가족에 대한 관점과 문화가 다릅니다.

시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반영’한 것도 매력적입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이라크 전쟁, 부시의 공화당 정권 반대,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 발매, 오바마 지지, 리먼 쇼크 등 현대사와 대중문화의 족적이 미국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165분은 부담스럽다

일상을 위주로 묘사해 기교를 최소화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것이 ‘보이후드’의 최대 매력입니다. 하지만 12년의 촬영 분량이 아까웠는지 165분이나 되는 러닝 타임은 부담스럽습니다. 압축된 편집의 미학이 아쉽습니다.

단편적이고 분절적인 것도 약점입니다. 이를테면 매디슨에 대한 2인조의 화장실 괴롭힘 장면에서 괴롭힘의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이후 2인조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 뜬금없습니다. 12년 동안 매해 각본이 소위 ‘쪽 대본’으로 집필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보이후드’를 아카데미 작품상의 강력한 후보로 거론하는데 12년 동안의 노력과 참신한 발상은 인상적이지만 작품상 수상까지 연결될지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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