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tomino.egloos.com

포토로그


메모장

KBReport 프로야구 필자/다음카카오 1boon/KBO 야매카툰

LG 트윈스 야구 전 경기 아프리카 생중계 http://afreecatv.com/tomino

사진, 글, 동영상 펌 금지합니다. 영화 포스터의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서 있습니다.

반말, 욕설, 비아냥, 협박 등의 악성 댓글은 삭제합니다. 비로그인 IP로 댓글 작성은 가능하지만 동일 IP로 닉네임을 여러 개 사용하는 '멀티 행위' 시 역시 삭제합니다.


겐지 이야기 1부 ① - 섹스광 겐지의 젊은 시절

※ 본 포스팅은 ‘겐지 이야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인 10세기를 배경으로 바람둥이 귀족 겐지와 그의 자손들이 일생 동안 벌인 파란만장한 연애를 묘사한 ‘겐지 이야기’는 11세기 경 여류작가 무라사키 시키부에 의해 집필된 대하 연애 소설입니다. 궁중 시녀 출신인 무라사키 시키부가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집필한 작품을 세토우치 자쿠초가 현대 일본어가 옮겼으며 김난주의 번역으로 전 10권의 한국어 완역본이 탄생했습니다.

희대의 섹스광 겐지

‘겐지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겐지가 여성 편력을 거듭하다 맞이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최고 권력자로 자리 잡는 1부, 온나산노미야를 둘러싼 겐지 주변의 갈등의 대두와 겐지의 아들 유기리의 불륜, 그리고 겐지의 죽음이 암시되는 2부, 그리고 겐지의 자손 가오루 및 니오노미야가 하치노미야의 세 자매와 펼치는 치정극 3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부는 전 10권 중에서 1권부터 5권까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겐지의 출생부터 39세의 봄까지의 시기입니다. 그중 이번 포스팅은 1권부터 3권 즉, 겐지의 31세의 봄까지를 다루려 합니다.

기리쓰보 제와 후궁 기리쓰보 갱의 사이에서 태어난 겐지가 3살 때 어머니 기리쓰보 갱의가 사망합니다. 어머니를 일찍이 여읜 것은 겐지에게는 평생의 한이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근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기리쓰보 제는 죽은 기리쓰보 갱의와 닮은 후지쓰보를 후궁으로 들입니다.

어머니와 닮은 후지쓰보를 흠모한 겐지는 18살에 계모 후지쓰보와 동침하는 패륜을 저지릅니다. 후지쓰보는 겐지의 아들을 임신하고 출산하게 됩니다. 훗날 왕위에 오르는 레이제이 제입니다. 기리쓰보 제는 후지쓰보가 낳은 아들이 겐지의 핏줄인지도 모른 채 겐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총애합니다. 기리쓰보 제가 영문을 모른 채 겐지의 아들을 예뻐하는 장면은 웃음과 더불어 비애를 복합적으로 자아냅니다.

천 년 전 작품인 만큼 겐지와 후지쓰보의 동침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없으며 훗날에 과거를 회상하는 우회적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섹스에 대한 노골적 묘사가 불가능했던 당대의 풍속을 감안하면 타협적이자 동시에 세련된 방식이기도 합니다. 겐지와 후지쓰보를 비롯해 섹스와 같은 작중 ‘중대 사건’은 종종 생략되며 후에 짤막하게 암시되는 것은 ‘겐지 이야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봉건 사회의 왕실과 귀족 계급 내부의 친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근친결혼의 요소가 일반적이었지만 겐지는 정도를 뛰어넘는 근친상간을 추구한 패륜적 인물입니다. 10대 시절 근친상간까지 감행하는 겐지를 통해 ‘겐지 이야기’가 윤리적 작품이 아니라 탐미적 작품임이 드러납니다. 21세기 막장 드라마보다 더욱 정도가 심합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오락성을 갖췄다고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겐지는 ‘빛나는 겐지’라는 별명처럼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몸에서 풍기는 향기로 인해 뭇 여성은 물론 남성들의 호감까지 얻습니다. 소년 고기미가 겐지와 자신의 누이 우쓰세미를 어떻게든 맺어주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겐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겐지와 고기미는 동성애 관계를 맺었음이 암시됩니다. 겐지는 양성애자의 성격을 지녔으며 남자들도 겐지의 외모와 향기에 반하는 장면이 자주 제시됩니다.

수려한 외모와 달리 겐지의 내면은 추악합니다. 근친상간을 자행하는 것은 물론 성폭행도 불사합니다. 희대의 섹스광입니다.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바람둥이’라는 세간의 평에 끊임없이 신경 쓰며 자기합리화에 애씁니다. 겐지의 내면은 좋게 말하면 인간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위선적이며 교활합니다. 문학 작품의 주인공으로는 적절한 입체적이며 현대적인 인물입니다. 주인공 겐지의 외모와 내면의 괴리가 ‘겐지 이야기’를 현대인들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승화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작자 무라사키 시키부가 여성이기 때문에 귀족 남성 겐지의 대상화가 가능하며 이를 통해 남성 위주의 봉건 사회에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성 작가가 ‘겐지 이야기’를 집필했다면 남성 위주의 봉건 사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여류 작가가 집필한 고전을 여성 학자가 현대 일본어로 번역하고 한국어 번역 또한 여성이 담당한 것은 절묘합니다. 우유체와 만연체의 여성적 문장이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섬세한 심리, 아름다운 풍경, 화려한 의복의 묘사, 그리고 운문과 산문의 조화 또한 여류 작가에게 어울립니다. 본문에서 직접 묘사가 생략된 사건과 인물의 심리 상태는 현대 일본어로 번역한 세토우치 자쿠초가 해설을 통해 세심하게 설명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무라사키의 등장

후지쓰보와 패륜을 저지른 18세의 겐지는 후지쓰보의 조카 무라사키에 한눈에 반합니다. 겐지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는 어머니 기리쓰보 갱의와 닮은 여자들입니다. 아버지 병부경과 떨어져 있던 소녀 무라사키를 겐지는 보쌈 하듯 자신의 사택 이조원으로 데려옵니다. 겐지는 한편으로는 후지쓰보와 패륜을 저지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라사키를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까 고심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는 반면 후지쓰보는 패륜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패륜에 대한 고뇌의 정도 차이가 겐지와 후지쓰보의 됨됨이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겐지는 처음부터 흑심을 품고 여자구실조차 할 수 없는 어린 무라사키를 가둬놓고 키웁니다. 무라사키는 아무것도 모른 채 겐지를 오빠, 혹은 아버지처럼 따릅니다. 따라서 겐지가 무라사키를 데려온 지 4년 뒤 초야를 치르자 약 14세의 무라사키는 겐지에 대한 배신감을 평생 동안 안고 겐지의 바가지를 긁는 신경질적인 아내가 됩니다. 당시 여성들은 섹스가 무엇인지 모른 채 남성의 성욕에 희생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봉건 사회의 부정적 단면 중 하나입니다.

작자 무라사키 시키부와 동일한 이름의 등장인물 무라사키는 ‘겐지 이야기’의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겐지가 가장 총애하는 아내이자 동시에 겐지와 가장 많이 다투는 아내가 됩니다.

정실 아오이 부인

겐지에게 정식 결혼한 아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좌대신의 딸이자 겐지의 절친한 친구 두중장의 누이 아오이 부인이 겐지의 첫 번째 부인입니다. 하지만 겐지보다 4살이나 나이가 많고 성적 매력이 떨어지며 가문이 맺어준 상대인 아오이 부인과의 부부 생활은 원만하지 못합니다. 겐지가 외간 여자들을 상대로 틈만 나면 바람을 피우게 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순탄치 못한 부부 생활 속에서 겐지와 아오이 부인 사이에 장남 유기리가 탄생하지만 그 와중에 겐지와 얽힌 여성 중 한 명인 육조 미야스도코로의 살아있는 원혼으로 인해 아오이 부인은 급사합니다. 아오이 부인의 급사를 묘사하는 부분은 괴담의 색채가 매우 강해 그에 앞서 2권 초반에 등장하는 잇꽃, 즉 스에쓰무하나의 못 생긴 외모를 풍자하는 해학적 분위기와는 대조적입니다.

‘겐지 이야기’에는 원혼에 의해 갑작스레 사망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의학 지식이 일천했던 대신 미신을 믿었던 비합리적 세태를 반영하지만 불교와 무속신앙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질병과 죽음의 인과관계를 해석하려 했던 당시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생무상’은 ‘겐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기도 합니다. 아오이 부인에 애정이 없었던 겐지는 유기리의 성장에 무관심합니다. 겐지를 더 많이 닮은 아들은 유기리가 아니라 후지쓰보와의 사이에서 패륜을 통해 탄생한 동궁, 즉 훗날의 레이제이 제입니다. 젊은 겐지는 자식의 양육보다는 여성 편력에 집중하는 철딱서니 없는 남성입니다.

‘겐지 이야기’에서 ‘전생의 인연’은 툭하면 언급됩니다. 불교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지만 겐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 하거나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급사가 발생할 경우 단골로 등장합니다. 귀족 여성들은 남편이 사망하거나 자신이 병환에 시달릴 경우 조금이라도 명을 늘리거나 혹은 편안한 내세를 위해 여승이 되는 풍습이 있었으며 겐지를 비롯한 남성들도 병환이 발생할 경우 절에서 요양하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색욕에 충실했던 겐지조차 출가에 대한 욕망을 종종 드러내는 이중적 모습을 드러냅니다. 겐지도 불교는 두려웠던지 출가해 여승이 된 여성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녀는 함께 취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함께 겐지가 견지했던 여성 편력의 금기 사항이었습니다.

귀양 중에도 성욕 못 버리고

아오이 부인과 무라사키, 그리고 육조 미야스도코로 외에도 우쓰세미, 유가오, 하나치루사토, 오보로즈키요 상시 등과 숱한 염문을 뿌리던 겐지는 아버지 기리쓰보 제의 사망을 계기로 배다른 동생 스자쿠 제와 외척 우대신 가의 견제로 인해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게 됩니다. 겐지의 처가 좌대신 가문도 몰락합니다.

스자쿠 제의 후궁 오보로즈키요와의 밀회가 우대신에게 발각된 겐지는 궁지에 몰린 끝에 스마로 자진해서 귀양을 떠납니다. 스마는 현재 고베 스마구로 아름다운 해수욕장이지만 당시에는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한 바닷가였습니다. 겐지가 26세에 맞이한 인생 최대의 위기입니다. 여자에 탐닉했던 겐지가 여자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것은 인과응보입니다. 스마에서의 귀양 생활을 통해 겐지는 권력의 힘과 인생무상을 절감합니다. 고전문학답게 교훈적입니다.

수도에서 사랑을 나누던 여자들을 비롯해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진 벽지 스마에서도 겐지는 강렬한 성욕을 떨치지 못합니다. 겐지의 성욕은 딸과 자손들을 출세시키고자하는 아카시 뉴도의 욕망과 맞아떨어집니다. 겐지는 아카시 뉴도의 딸 아카시 아씨와 맺어져 딸을 낳습니다. 귀양을 가서도 여자를 찾아내 임신을 시키는 행태는 겐지답습니다. 아카시 뉴도의 자손에 대한 맹렬한 출세욕은 훗날 늙은 겐지가 아카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그 자손들에게 보이는 강한 출세욕에 대한 복선입니다.

2년 만에 아카시 부인은 겐지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겐지는 자진 귀양을 마치고 수도로 복귀합니다. 아카시 부인과의 사이를 무라사키 부인에게 알리고도 눈치만 보던 겐지는 이윽고 아카시 부인과 그녀가 낳은 딸을 수도로 불러들입니다. 아카시 부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 귀한 자신의 처지 상 딸이 장차 정치적 입지를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미야스도코로가 사망하가 전 겐지에게 처지를 의탁한 딸 전(前) 재궁은 겐지의 아들 레이제이 제의 후궁이 됩니다. 자신의 후손을 빨리 낳아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함입니다. 귀양에서 복귀한 후 아카시 부인과 전 재궁을 대하는 겐지의 태도는 매우 정치적입니다. 귀양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정치인으로서의 겐지의 면모를 각성시킨 것입니다.

권력 보장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여성들은 불행한 존재입니다. 아카시 부인도 아내를 여럿 거느린 바람둥이 겐지가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해줄 평범한 남자를 만나는 편이 여자로서 행복했을 것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서다

스자쿠 제가 레이제이 제, 즉 겐지의 아들에게 양위하면서 겐지와 후지쓰보는 권력의 정점에 섭니다. 고난을 극복한 주인공이 최고 권력을 누리는 전개는 고전 문학에서 전형적인 것입니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당시로 따지면 장년에 접어든 30대 초반의 겐지는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여자관계에 귀양 이전보다 신중해지게 됩니다.

겐지의 정치적 행동에 초점을 맞춰 소재가 풍부해지면서 ‘겐지 이야기’는 연애 소설의 성격이 약화되는 대신 정치 소설의 성격이 강화됩니다. 겐지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도 연애 소설의 성격이 약화되는 요인입니다. 겐지의 연애 행각에 거부감을 느낀 독자라면 정치 소설로의 변모가 반가울 것입니다.

겐지는 새로운 여자를 찾아내 관계를 맺기보다 기존의 여자관계를 수습하는데 골몰합니다. 육조원을 짓고 이전에 관계를 맺었던 여자들을 모두 불러 함께 생활하는 것은 뭇 남성이 꿈꾸는 할렘의 완성입니다. 김만중의 ‘구운몽’에서 주인공 성진이 변모한 양소유가 8선녀와 모두 함께 살게 되는 전개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겐지는 육조원으로 불러들인 여자들 중 다수와 더 이상 성관계를 맺지 않아 성숙해진 일면을 보입니다.

궁중에서 벌어진 그림 대결에 임하는 겐지의 모습은 풍류의 극치입니다. 겐지의 스마 귀양 시절을 묘사한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귀양 생활이 겐지의 인생에서 최대 전환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윤리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그림 해석에 있어서는 진보적이 아니라 보수적인 겐지의 태도는 이채롭습니다.

겐지의 여성 취향은?

바람둥이 겐지는 욕망에 충실합니다. 한번 마음에 둔 여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합니다. 이를테면 유부녀 우쓰세미는 성폭행해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겐지 이야기’에는 남성에 의해 강제로 범해지거나 혹은 남편이나 연인을 가장한 다른 남성에 의해 오밤중에 속아 관계를 맺는 여성이 자주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섹스를 하며 불을 밝히지 않았던 것은 물론 대화도 하지 않았던 풍습 때문입니다. 만일 스에쓰무하나의 추악한 외모를 불빛 아래서 보았다면 겐지는 그녀와 섹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명백한 성폭행이 당시 일본에서는 횡행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쓰세미는 성폭행과 다를 바 없는 첫 섹스 이후에 겐지를 그리워하는데 현대의 독자,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는 거부감이 야기될 만한 전개입니다.

작자 무라사키 시키부도 첫 남편 후지와라노 노부다카와 오밤중에 불분명한 섹스를 통해 맺어진 바 있습니다. 따라서 ‘겐지 이야기’에서 빈번히 묘사되는 오밤중의 불분명한 섹스는 작자 본인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겐지가 18세 때 어린 무라사키를 어떻게든 취하려 하자 겐지의 부하 ‘고레미쓰는 참으로 구석구석 빈틈이 없는 호색가이시로군. 아직 철부지 어린애인데.’라며 어처구니없는 섹스광 겐지의 뻔뻔스러움에 탄식합니다. 돈주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겐지는 항상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여자들보다는 근본적으로 맺어지기 쉽지 않았던 여자들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했던 ‘노력파 바람둥이’였습니다. 1권 60페이지에서도 겐지는 ‘마음고생의 씨가 될 사랑을 굳이 관철하려는 골치 아픈 버릇이 있는 터’라고 작자 무라사키 시키부는 규정합니다.

정실 아오이 부인에 무관심했던 반면 계모에 해당하는 후지쓰보, 남편이 있던 우쓰세미, 어린 무라사키와 관계를 맺었던 것에서 겐지의 독특한 ‘취향’이 드러납니다. 후지쓰보와의 관계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현된 겐지이지만 무라사키에 대해서는 롤리타 콤플렉스도 드러납니다. 늙은 전시와의 관계도 불사했던 겐지임을 보면 겐지의 바람기는 실로 기준을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스에쓰무하나의 추악한 외모는 웃음거리로 희화화되는데 안타까움마저 자아냅니다. 외모지상주의는 예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겐지 이야기’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던 일본의 아이돌 그룹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유래가 된 ‘빛나는 겐지’와 무라사키를 비롯한 외모가 아름다운 인물에 대한 찬사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외모가 추악한 이들에 대해서는 마구 깎아내려 웃음거리로 비하합니다. 추악한 외모는 따돌림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 특유의 이지메 문화가 그들의 고전부터 엿보이는 듯합니다.

당시 귀족 사회 풍습

‘겐지 이야기’가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고전이 된 이유 중 하나는 예술과 풍류 등 당시 귀족 문화에 대한 묘사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귀족들은 연애 초기 단계에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편지로 교류했습니다. 동침 이후에도 서신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했습니다. 동침 후 새벽에 귀가한 남자의 편지가 빨리 도착할수록 여자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본문에 삽입된 시들은 산문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뒤에 짧은 글로 보다 솔직한 심경을 덧붙인 것입니다. 사족이라 볼 수도 있지만 남녀 간에 맨 얼굴을 보기 쉽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보다 정확하게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의 일본 왕실에서는 고려악이 자주 연주되었습니다. 겐지의 운명을 점친 발해 출신의 관상가와 더불어 한반도의 일본에 대한 영향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부록 풍부하지만…

도판, 계보도, 연표 등 부록이 풍부해 볼거리가 많으며 본편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하지만 어구 해설이 본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어떤 부분에서 유래된 것인지 명시되지 않은 점은 아쉽습니다. 본문에 각주로 붙이거나 미주 처리 시 번호를 붙였다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권두의 컬러 도판은 일본적이며 아름답지만 설명이 전혀 없이 본문의 어느 부분과 구체적으로 연관된 것인지 알 수 없어 미진합니다.

1권 300페이지 ‘귀족들은 결혼을 빨리 했기 때문에 신랑이 아직 어린 경우가 많고 신부가 연상의 신랑을 데리고 자는 역할을 맡았다. 신부가 첫날밤 어린 신랑을 리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에서 ‘연상의 신랑’은 ‘연하의 신랑’의 오타로 보입니다.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진냥 2014/09/22 19:24 #

    도서관에서 먼지 냄새 나는 나남출판사 판으로 겐지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그때는 단순한 겐지의 여성편력기로만 여기고 욕을 퍼부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시대의 새로운 맛이 묻어나서 즐겁습니다.
    ....뭐, 지금도 겐지는 욕하지만요.
  • 신중한 기린 2014/09/22 22:48 #

    저도 디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위에 댓글님처럼 겐지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가 기억나네요. 섹스광이라..., 깊이 공감하면서 잘 읽고갑니다. 다음 글도 기대할께요
  • shine 2014/09/23 16:18 # 삭제

    황녀 숙소에서 눈오는 밤을 지내고, 무라사키가 궁금해서 눈내린 새벽 달려오지만, 시녀가 왠지 괘씸해서 문을 늦게 열어주는데도... 밖에서 기다리자니 추운데, 그건 시녀가 문을 늦게 열어줘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당신을 두려워해서 그런다는 대사를 읊어대는 중년(그 시절엔 늙은 나이라니까)의 겐지....
    이 정도 로맨틱한 대사를 읊어댈 수 있으면 인정... 그런 기분이 들었었죠^^

    80년대 판 오래된 책을 가졌기 때문에 완역판을 꼭 읽어보고 싶은데, 오래된 책에 익숙하다 보니 좀체로 손이 잘 안 갔는데, 포스팅 읽으니 다시 의욕에 불타게 됩니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