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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 - 시간 뒤죽박죽, 홍상수가 선사하는 흥미진진한 퍼즐 영화

※ 본 포스팅은 ‘자유의 언덕’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본 포스팅은 3개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류에 대한 수정은 후에 작성된 ‘자유의 언덕 - 벗겨도 벗겨도 새롭다(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권(서영화 분)을 찾아 무작정 한국에 온 일본인 모리(카세 료 분)는 카페 여주인 영선(문소리 분)과 만납니다. 모리는 만날 수 없는 권을 향해 애틋한 편지를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선과 가까워집니다.

‘자유의 언덕’ 제목의 뜻은?

홍상수 감독의 16번째 장편 영화 ‘자유의 언덕’은 제목부터 뜬금없습니다. 마치 20세기 반공 영화나 정치 영화 같습니다. 극중 중요 공간적 배경으로 여주인공 영선이 운영하는 카페 ‘지유가오카 핫초메(自由が丘8丁目)’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한국어로 풀어 ‘자유의 언덕’이 된 것입니다. 일본인 배우 카세 료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것과 일본 도쿄의 거리 이름에서 따온 카페 이름 ‘지유가오카 핫초메’는 묘하게 상통합니다. 일본에서는 12월 공개 예정으로 개봉명은 ‘지유가오카 핫초메(自由が丘8丁目)’로 결정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뜬금없는 제목을 지닌 경우가 많았지만 ‘자유의 언덕’은 그 정도가 심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지난 8월 29일 언론시사회가 종료된 뒤 기자간담회에서 제목 ‘자유의 언덕’의 뜻에 대해 ‘영화 촬영을 마친 후 갑자기 떠올랐는데 카페 이름과 비슷하면서도 정확하게 의미가 겹치지는 않으나 공간적 배경인 삼청동, 북촌, 이태원 경리단길 등 언덕에 살짝 겹치는 등 여러 의미로 걸치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애매모호함과 즉흥성을 즐기는 홍상수 감독답습니다.

성적으로 자유로운 인물들

극중 인물들의 뜬금없는 행동을 감안하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뜬금없는 제목을 지닌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기까지 합니다. ‘자유의 언덕’의 등장인물의 뜬금없는 행동은 제목에 명기된 ‘자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 언덕’은 뜬금없는 제목보다 필연적인 제목에 훨씬 가깝습니다.

모리는 ‘가장 훌륭한 사람’아라 극찬하는 권을 찾아 한국에 올 정도로 사랑이 지극합니다. 하지만 권과 재회하지 못하는 가운데 영선을 만나 마음이 흔들리고 결국 두 차례 동침합니다. 첫 번째 동침 후 자신의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며 스스로를 ‘어리석다(Stupid)’고 규정하고 이후 결별을 고하려 하지만 오히려 대낮의 두 번째 동침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을 사랑하느냐는 영선의 질문에 모리는 주저 없이 사랑한다고 답합니다. 모리의 자유분방함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은 문손잡이 고장으로 화장실에 몇 시간 동안 갇히는 것으로 벌을 받습니다.

영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사귀어 권태기에 접어들어 다른 여자와도 만나는 남자친구 광현(이민우 분)에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광현이 영선의 집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동침한 적마저 있습니다. 하지만 영선도 모리와 동침합니다. 아마도 같은 침대에서 영선은 광현과 동침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영선이 광현을 탓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녀 또한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성적 자유분방함은 본성에 가깝다는 것이 ‘자유의 언덕’의 주제의식입니다. 결말은 모리가 게스트하우스의 다른 방에 묵고 있는 남희(정은채 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는 장면으로 장식됩니다. 모리는 권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영선과 동침하고 남자친구가 있는 남희의 뒷모습에 정신이 팔립니다. 누군가를 유일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며 사랑은 거짓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 홍상수 감독 특유의 냉소적 시선이 ‘자유의 언덕’에서도 되풀이됩니다.

모리가 영선을 만나기 전부터 권과 영선은 아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리는 자신의 심경과 행동에 대해 권에게 편지를 남겼지만 영선과 가까워지고 동침한 사실까지 편지에서 솔직하게 밝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리산 여행을 다녀온 권은 영선과 아무렇지도 않게 만납니다. 권이 모리와 영선의 동침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장면입니다. 만일 권이 동침을 알고도 영선을 태연히 대했다면 놀라운 인내심을 갖춘 것이고 권이 몰랐다면 모리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권과 영선의 극중 유일한 만남에도 거짓이 개입된 셈입니다.

사랑은 꿈

‘사랑’과 연결될 수 있는 단어는 ‘꿈’입니다. 모리는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찾아주며 영선과 가까워집니다. 영선은 보답으로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강권하고 두 사람은 저녁을 함께 먹으며 가까워집니다. 광현은 모리에게 ‘꾸미’가 ‘꿈’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설명합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노출이나 섹스 장면은 제시되지 않지만 모리와 영선은 섹스를 마치고 침대 속에서 달콤한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사랑이 달콤한 꿈임을 입증하는 장면입니다. 광현과의 관계에 골머리는 앓던 영선에게 모리가 새로운 꿈을 선사한 셈입니다. 영선의 강아지 꾸미를 모리가 찾아준 것은 영선의 달콤한 꿈을 모리가 찾아준다는 중의적 암시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꿈은 달콤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허황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리는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 권과 재회해 그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내레이션을 통해 두 사람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언급됩니다. ‘춘향전’과 같은 전래 동화에나 어울릴 법하며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는 부합하지 않는 해피엔딩입니다.

하지만 뒤이은 장면에서 게스트하우스의 모리의 방에서 영선이 홀로 낮잠에서 깨어나고 모리가 방 앞 테이블에 있습니다. 모리가 권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 두 아이를 낳았다는 내레이션은 모두 꿈에 불과했으며 모리와 영선의 관계가 지속되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편집입니다. 낮잠과 꿈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비롯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메멘토’?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시간’입니다. 포스터에도 드러나듯 모리가 항상 휴대하는 문고판 책의 제목이 바로 ‘시간’입니다. 주변 인물들이 책 내용을 물을 정도로 시간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은 시간을 마구 흐트러뜨려 놓습니다. 모리가 쓴 두툼한 편지 묶음을 권이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시간순서가 뒤죽박죽이 됩니다. 따라서 영화의 편집 또한 서두의 모리의 한국 입국 및 게스트하우스 체크인 이후부터는 시간순서와는 무관하게 재배치됩니다. 이를테면 영선이 모리에게 강아지 꾸미를 찾아준 보답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장면이 먼저 제시된 후에 모리가 꾸미를 발견해 영선에게 건넵니다. 모리가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고 일어나는 장면이 제시된 한참 후에 모리가 권의 아파트 현관문에 메모를 붙인 뒤 아파트 앞 식당을 찾아 비빔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시간순서를 재배치한 영화로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한 ‘메멘토’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멘토’는 일부 회상 장면을 제외하면 시간의 역순으로 일직선상에 가깝게 편집된 데 반해 ‘자유의 언덕’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입니다. A-B-C-D의 순서로 발생한 사건을 B-D-A-C와 같은 순서로 재배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해석에 따라서는 C-B-D-A, 혹은 D-A-C-B 등 자유롭게 해석될 여지도 있습니다. 장면의 순서와 인과 관계는 정답이 없는 퍼즐과도 같습니다. 러닝 타임은 67분으로 일반적인 상업 영화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함축해 담고 있는 이야기는 두 배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목 ‘자유의 언덕’에서 ‘자유’란 관객이 얼마든지 영화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듯도 합니다. ‘메멘토’는 한정판(Limited Edition) dvd를 통해 시간 순서대로 재편집한 버전을 내놓기도 했지만 자신의 연출작의 자유로운 해석을 즐기는 홍상수 감독이 ‘자유의 언덕’의 시간순서 재편집판 dvd나 블루레이를 내놓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재해석할 수 있는 ‘자유’

일부 장면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리와 광현이 다투는 장면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단지 대사와 모리의 얼굴에 남은 상처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예의를 중시하는 일본인이 여자를 두고 주먹 싸움을 벌이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닙니다. 따라서 게스트하우스 여주인 구옥(윤여정 분)은 모리가 ‘일본사람 같지 않다. 한국사람 같다’고 규정합니다.

모리와 권이 함께 일본으로 떠나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레이션 뒤에 삽입된 영선이 모리의 방에서 낮잠을 깨어나는 장면 사이에는 무엇이 생략되었는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즉 영선이 모리의 방에 왜 왔는지, 어쩌다 낮잠을 자게 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여백은 관객이 스스로 자유롭게 메우면 됩니다. 물론 결말 또한 열려 있습니다.

기자간담회에서 윤여정은 홍상수 감독이 ‘시간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고 언급한 바 있다고 밝혔습니다. 시간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중반 이후부터 ‘자유의 언덕’은 매우 흥미진진한 영화가 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남녀가 우연히 만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술을 마시고 뜬금없이 동침하는 엇비슷한 과정을 다양하게 변주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의 언덕’은 독특한 편집 및 생략을 통해 유난히 독특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액자식 구성도 놓칠 수 없습니다. 모리의 행적은 그가 남긴 편지를 권이 읽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하지만 모리가 일본으로 떠난 이후에 권이 편지를 읽게 된 것인지, 아니면 떠나기 전에 읽게 된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서두는 분명 액자식 구성이지만 결말은 액자식 구성이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일상적 영어 대사의 기묘함

홍상수 감독은 ‘다른 나라에서’에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기용한 바 있습니다. ‘자유의 언덕’에 일본인 배우 카세 료를 기용한 것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낯선 문화에서 이방인이 겪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김치나 불고기, 한류 문화에 대한 인상을 설명하는 진부한 상황 묘사가 아니라 국적과 언어가 다른 인간 간에 겪을 수 있는 기묘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다른 나라에서’에서 이자벨 위페르로 인해 영어 대사가 상당 부분 활용되었는데 ‘자유의 언덕’의 영어 대사 비중은 더욱 높아져 거의 모든 대사가 영어입니다. ‘레스트리스’에서 이미 영어 실력을 과시한 카세 료의 영어 대사는 유창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일본인 특유의 영어 발음 한계를 극복합니다.

기본적으로 홍상수 감독 영화의 대사는 영화적으로 정제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일상적이며 단순해 오히려 기묘하지만 ‘자유의 언덕’은 한국 영화이면서도 단순한 의미의 대사를 거의 모두 영어로 말하니 더욱 기묘합니다. 홍상수 감독이 추구하는 일상의 뜬금없음, 혹은 낯선 기묘함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모리는 일본인임에도 일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반면 게스트하우스에서 친해지게 된 상원(김의성 분)은 모리와의 이별 직전 그와 포옹하며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본어 ‘私はあなたを愛してる(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를 서툴게 말합니다. 구옥은 모리를 유일하게 ‘모리 상(もりさん)’이라 부르는 인물입니다. 상원의 지인인 술집 주인인 백인이 상원에게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는 사이 모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카세 료, 홍상수에 녹아들다

주인공 모리는 한국에서 어학원 강사로 재직한 바 있으나 현재는 무직입니다. 영선과의 삼각관계를 직감한 광현은 ‘하는 일이 없군요? 일을 해야죠. 예술가처럼 보여요’라며 비아냥댑니다. 모리가 광현과 주먹다짐을 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영선을 가운데 둔 삼각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무직 상태에 대한 광현의 비아냥댐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모리는 어학원 동료 강사와도 다툰 적이 있습니다. 다혈질적인 기질로 인해 모리를 두고 구옥이 ‘한국사람 같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로드 무비의 성격이 강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여자와 동침하기까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시간을 때웁니다. 따라서 골목이나 거리를 걷는 장면이 자주 제시됩니다. 무직 상태로 여행 중이라 서두를 것 없는 모리는 아침에는 늦잠을 잡니다. 구옥은 모리를 ‘게으르다’고 지적합니다. 빈둥거리며 여자를 꾀고 밤에는 술자리로 시간을 보내는 모리는 국적만 일본인일 뿐 홍상수 감독 영화의 전형적 남자 주인공입니다.

모리는 책 ‘시간’을 손에 든 채 일본 브랜드 아식스의 운동화를 직직 끌면서 여기저기를 배회합니다. 일부 장면의 도입 혹은 마무리를 위해 삽입된 피아노 연주를 제외하면 배경 음악이 거의 없는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의 신발 끄는 소리는 영화 전체를 지배합니다.

카세 료의 연기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도쿄!’, ‘레스트리스’, ‘사랑에 빠진 것처럼’ 등 일본 외의 외국인 감독의 연출작에 출연했을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자유의 언덕’ 출연 전부터 좋아했으며 첫 만남에서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완전히 녹아들었기 때문입니다. 카세 료의 이전 출연작들과의 연기 스타일 비교 또한 ‘자유의 언덕’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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