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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 ‘박쥐’ 모티브, ‘격정’ 사라져 밋밋 영화

※ 본 포스팅은 ‘테레즈 라캥’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사망한 뒤 고모 라캥 부인(제시카 랭 분)의 집에 맡겨진 테레즈(엘리자베스 올슨 분)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촌 카미유(톰 펠튼 분)와 결혼합니다. 지병으로 인해 허약한 카미유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사랑을 카미유의 친구 로랑(오스카 아이삭 분)에 의해 충족된 테레즈는 로랑과 함께 카미유를 살해합니다.

‘격정’ 찾아볼 수 없는 영화화

찰리 스트래튼 감독의 ‘테레즈 라캥(In Secret)’은 에밀 졸라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찰리 스트래튼 감독이 영어권 배우들을 캐스팅해 영화화했습니다. ‘테레즈 라캥’은 박찬욱 감독의 2009년 작 ‘박쥐’의 모티즈를 제공한 소설입니다. 따라서 영화 ‘테레즈 라캥’은 ‘박쥐’와 기본적인 서사는 거의 동일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병약한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정부(情夫)와 모의해 남편을 익사시키지만 죄의식을 견디다 못해 정부와 정사(情死)한다는 줄거리는 ‘박쥐’와 ‘테레즈 라캥’이 같습니다.

하지만 세세한 차이가 오히려 두드러집니다. 흡혈귀라는 독특한 요소에 착안하면서도 현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한 ‘박쥐’와 달리 ‘테레즈 라캥’은 근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원작의 영상화에 충실합니다. ‘박쥐’는 불륜에 빠진 신부(神父) 상현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반면 ‘테레즈 라캥’은 테레즈를 주인공으로 그녀의 시점에 따라 전개됩니다. ‘박쥐’는 상현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레즈의 역할에 해당하며 이름도 테레즈와 유사한 태주의 시점에 상당 부분 할애하지만 ‘테레즈 라캥’은 테레즈의 시점에 집중해 로랑은 상대적으로 대상화되어 심리 묘사에 소홀합니다.

‘테레즈 라캥’이 ‘박쥐’에 비해 가장 크게 부족한 것은 바로 ‘격정’입니다. ‘박쥐’는 결혼과 연애가 금지된 신부가 흡혈에 대한 열망으로 비유되는 격정에 빠지는 과정을 탁월하게 각색했으나 ‘테레즈 라캥’에는 격정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영상을 통해 승부하는 영화인만큼 등장인물들이 대사를 통해 ‘나는 사랑에 빠졌다’고 거듭 말하는 것보다 행동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데 ‘테레즈 라캥’에서는 섹스 장면이 분절적이며 노출도 거의 없습니다. 불륜과 살인으로 연결되는 끈적거리는 격정 표현이 매우 미약합니다.

박쥐’가 주연 배우 송강호와 김옥빈의 파격적 노출로 인해 개봉 당시 화제가 되었던 것에 비하면 ‘테레즈 라캥’은 배우들이 몸을 사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유명 배우들이 노출을 꺼리는 할리우드의 풍토가 근본적인 한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화 과정에서 붙은 제목 ‘In Secret’처럼 밋밋합니다.

인상적인 캐스팅

캐스팅은 인상적입니다. 서두에 잠시 등장하는 테레즈의 아역 릴리 라이트는 엘리자베스 올슨의 이미지와 매우 유사합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의 추가 장면에 등장해 내년에 개봉될 ‘어벤져스 2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출연했으며 ‘고질라’에도 등장해 최근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엘리자베스 올슨은 주연을 맡아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오종종한 이목구비로 인해 전형적인 할리우드 여배우들에 비해 이국적 이미지가 강해 프랑스 여인 테레즈에 어울립니다. 엘리자베스 올슨은 ‘올드보이’의 리메이크에도 출연한 바 있는데 박찬욱 감독의 영화와는 묘한 인연이 있습니다.

인사이드 르윈’에 이어 또 다시 얼치기 예술가의 역할을 맡은 오스카 아이삭,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말포이로 익숙한 톰 펠튼, 그리고 1976년 ‘킹콩’의 히로인으로 깜짝 데뷔했던 제시카 랭 등 조연 배우들까지 화려한 캐스팅이 배역의 이미지에 부합합니다.

장점은 없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의상과 세트 등 시대 고증과 음습함의 재현은 ‘테레즈 라캥’이 충실합니다. ‘박쥐’에 비해서는 미약하지만 수잔(셜리 헨더슨 분) 등 조연이 이끄는 기괴한 분위기로 인해 카미유가 사망한 중반 이후에는 호러의 요소가 강화됩니다. 고양이 또한 불길함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로랑 역의 오스카 아이삭이 주연을 맡았던 ‘인사이드 르윈’에서 고양이의 높은 비중을 감안하면 흥미롭습니다.

가장 중요한 카미유 살해 장면이 생략된 뒤 후반에 회상을 통해 삽입되는 세련된 연출도 인상적입니다. 불륜, 고부 갈등, 치정 살해 등 막장 드라마의 서사를 지녔으며 등장인물의 숫자가 적은 연극적 요소를 잘 살렸습니다.

어린 테레즈가 라캥 부인의 집으로 향하는 서두의 첫 장면에서 물이 강조되고 카미유가 물에 빠지는 악몽을 꾼 것은 카미유의 익사를 암시합니다. 테레즈와 카미유 부부를 앞에 두고 로랑이 자신까지 포함해 세 젊은이가 모두 무덤에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라캥 부인에게 농담한 것은 결말에서 고스란히 실현됩니다.

결혼식 장면이 한 번만 제시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테레즈와 카미유의 합법적인 결혼식 장면은 제시되지 않지만 카미유를 살해한 테레즈와 로랑의 비도덕적인 결혼식 장면은 삽입됩니다. 테레즈와 로랑이 성스러운 공간인 성당에서 느끼는 죄의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입니다.

근대 여성의 불우한 처지

‘테레즈 라캥’에서 주목할 것은 근대 서구 여성의 불우한 처지입니다. 테레즈의 두 번의 결혼은 모두 타의에 의해 결정됩니다. 테레즈가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신분과 무관하게 당시 여성들은 자신의 의사에 의해 결혼 상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집안 어른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테레즈의 불행은 불우한 시대상에 개인적 불운까지 겹쳐 엎친 데 덮친 격이 됩니다. 라캥 부인은 어린 시절부터 사촌 지간인 카미유와 테레즈를 한 침대에서 재웁니다. 병약한 카미유를 위해 테레즈를 이용하려는 속셈을 노골화합니다. 어린 소녀의 인격이나 성적 수치심, 그리고 미래를 송두리째 짓밟은 채 아들을 위하는 비열하며 변태적인 이기심으로 가득합니다.

이채로운 것은 라캥 부인이 끔찍이 아끼는 카미유의 명의로는 재산을 한 푼도 남겨 놓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라캥 부인은 카미유가 병약해 자신보다 먼저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항상 품고 있었던 듯합니다. 수전노 라캥 부인은 외동아들을 깊이 사랑했지만 그보다는 자기애가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제인 ‘격정’이 미약한 것처럼 제시카 랭은 ‘박쥐’에서 김해숙이 내뿜은 집요하며 압도적인 카리스마에는 못 미칩니다.

‘테레즈 라캥’의 한글자막에는 ‘네가 죽기를 바랬어’라는 오류가 보입니다. ‘네가 죽기를 바랐어’가 옳습니다.

http://twitter.com/tominodij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