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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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 도플 갱어, 거미줄처럼 뒤얽힌 악연 영화

※ 본 포스팅은 ‘에너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역사 부교수 아담(제이크 질렌할 분)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갑니다. 어느 날 동료 교수가 권한 영화를 관람한 아담은 자신과 꼭 닮은 단역 배우 앤서니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앤서니의 집에 전화한 아담은 앤서니의 아내 헬렌(사라 가돈 분)과 통화해 자신과 앤서니가 목소리마저 똑같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외모는 빼닮았지만 성향은 다른 두 남자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에너미’는 외모가 동일한 두 명의 성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주제 사마라구의 2002년 작 소설 ‘도플 갱어(원제 ‘Double’)’를 영화화했습니다.

차분한 성격의 지적인 아담에게는 친밀하지만 권태기를 느끼는 연인 마리(멜라니 로랑 분)가 있습니다. 반면 뻔뻔스러운 다혈질의 앤서니는 아내 헬렌이 임신 6개월이지만 바람을 피웠던 전력이 있으며 비밀 섹스 클럽에 출입합니다. 아담은 승용차를 소유 중이지만 앤서니는 모터사이클을 즐깁니다. 아담은 싫어하는 블루베리를 앤서니는 좋아합니다. 얼굴, 손, 목소리, 심지어 가슴의 흉터까지 동일한 두 사람이지만 성격과 생활 방식은 대조적입니다.

앤서니는 서두로부터 약 30분 뒤에 제시되는 아담과의 전화 통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아담이 자신의 집 화장실로 들어가 전화 통화하자 앤서니가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나오며 전화를 끊는 장면으로 전환되어 두 사람의 동일성을 강조합니다.

아담과 앤서니는 서로를 훔쳐보며 상대의 생활을 탐합니다. 사생활 엿보기, 타인이 되고픈 욕망, 남의 여자와의 섹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현실로부터의 일탈이 두 성인 남성을 자극합니다. 앤서니는 마리와의 섹스를 갈망해 아담을 다그쳐 옷과 승용차를 강탈하고 아담 또한 앤서니의 집으로 가 앤서니를 가장해 행동합니다. 두 주인공이 서로를 감시하다 ‘타인의 삶’을 체험하는 전개는 아담의 역사 강의에서 언급되었던 감시 체제 및 역사의 반복에서 이미 암시된 요소입니다.

‘에너미’는 기본적으로 ‘왕자와 거지’의 설정을 지녔으며 ‘현기증’을 비롯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미스터리 스릴러를 연상시킵니다. 섹스에 대한 집착과 정체 맞바꾸기, 그리고 판타지적 성향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데드 링거’, 데이빗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등의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허구 속에서 타인을 가장하는 배우 앤서니가 연기 연습을 통해 아담을 다그쳐 마리와의 섹스를 꾀하는 것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판타지적 성격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아담 또한 앤서니를 ‘연기’합니다.

아담과 앤서니가 동일한 외모를 지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결말까지 규명하지 않고 관객의 상상에 맡깁니다. 왜 앤서니가 원형 그대로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아담이 찢어진 채 지녀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쌍둥이일 가능성은 아담의 어머니 캐롤라인(이사벨라 로셀리니 분)에 의해 부정됩니다. 설령 쌍둥이라 해도 흉터까지 동일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거미의 이미지

‘에너미’는 거미의 이미지가 지배합니다. 오프닝의 비밀 섹스 클럽에서 큼지막한 거미가 등장합니다. 몸은 여성의 나체이지만 얼굴은 거미인 기괴한 존재가 천장에 매달린 채 복도를 지나가며 마주치는 꿈을 아담은 꿉니다. 또 다른 아담의 꿈에서는 포스터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거대한 거미가 도시의 빌딩숲을 횡단합니다.

앤서니는 아담을 가장했다 마리와의 언쟁 끝에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앤서니가 강탈해 사고가 발생한 아담의 차량 창문에는 거미줄 모양으로 깨진 자국이 드러납니다. 아담과 앤서니의 기괴한 인연을 뒤얽힌 거미줄로 비유한 것과 동시에 거미가 앤서니의 사망을 운명적으로 조종했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앤서니가 사망한 뒤 아담은 ‘본인 외 개봉 금지’라 표기된 앤서니의 우편물을 개봉해 비밀 섹스 클럽의 열쇠를 손에 넣습니다. 이제 아담은 앤서니가 된 것입니다. 아담은 장소의 실체는 숨긴 채 비밀 섹스 클럽에 가려는 마음을 헬렌에 밝힙니다. 하지만 헬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거대한 거미로 변신해 아담을 위협하는 것이 ‘에너미’의 결말입니다.

서두를 비롯해 두 번 제시된 헬렌의 임신한 나체의 배가 둥그렇고 커다란 거미와 닮았음을 상기하면 거미는 곧 헬렌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너미’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담 혹은 앤서니가 아니라 두 남자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헬렌이라는 관점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헬렌은 운명의 실타래를 관장하는 세 여신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이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다는 발상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드니 빌뇌브, 전작에 비하면 아쉽다

원작 소설은 포르투갈어로 집필되었지만 드니 벨뇌브 감독은 조국 캐나다 퀘벡을 공간적 배경으로 ‘에너미’를 재해석합니다. 서두와 엔딩 크레딧을 비롯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거대 고층 아파트가 밀집된 퀘벡의 독특한 풍경은 세피아톤의 건조하고 삭막한 영상을 연출합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국의 대도시와는 달리 기묘하고 이국적이어서 아시아 혹은 동유럽의 대도시를 연상시킵니다. 거대 아파트는 주차장의 CCTV와 함께 아담이 강의 중에 언급하는 감시 체제와도 연관 지을 수 있는 공간이며 현대인의 개성 상실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퀘벡이기에 미국인 배우 제이크 질렌할과 프랑스인 여배우 멜라니 로랑이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습니다.

아담이 앤서니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극중 영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는 제목부터 뜬금없습니다. 화사함이 강조된 영상 및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로 인해 본편 ‘에너미’의 삭막한 영상 및 배우들의 진중한 연기와는 극도로 대조적입니다. 아담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내 관람하는 앤서니의 다른 출연작들 또한 제목이 우스꽝스럽습니다. 아담의 동료 교수가 아담에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를 권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나 아담과 닮은 앤서니의 출연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적어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에너미’는 중층적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어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관객들은 지루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작 ‘그을린 사랑’과 ‘프리즈너스’에 비하면 강렬함이 덜한 것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을린 사랑 - 전쟁 참화 극복한 신화적 모성
프리즈너스 - 보기 드문 수작 스릴러
프리즈너스 - 종교가 외려 악마를 낳다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래빗4 2014/10/08 15:39 # 삭제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이런 강렬한 영화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읽다보니 그을린 사랑과 프리즈너스 감독 작품이었네요.
    두 영화 모두 갠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영화인데, 아마도 이 감독 팬이 될거 같습니다.
    그리고 거미에 대한 해석이 참 좋았어요. 엔딩도 너무 맘에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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