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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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빙 미스터 뱅크스 - ‘아버지 구하기’ 통한 고통의 치유 영화

※ 본 포스팅은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파멜라 트래버스(엠마 톰슨 분)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동화 ‘메리 포핀스’를 월트 디즈니(톰 행크스 분)가 영화화하는 것을 구두로 허락합니다. 각본 감수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트래버스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채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아 디즈니와 제작진을 곤혹스럽게 합니다.

트래버스와 디즈니, 영국과 미국의 대립

존 리 핸콕 감독의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는 1964년 작 뮤지컬 영화 ‘메리 포핀스’의 각본 감수 과정에서 있었던 1961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트래버스와 디즈니의 충돌은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두 캐릭터의 대립입니다.

트래버스는 유서 깊은 유럽의 도시 영국 런던, 디즈니는 신흥 대도시 미국 LA를 상징합니다. 트래버스는 어린 시절을 호주에서 보냈으며 아일랜드 혈통을 지녔습니다. 반면 디즈니는 전형적인 미국인입니다. 트래버스는 홍차를 즐기며 군것질을 싫어하지만 디즈니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케이크와 도넛 등 단 음식으로 채워놓고 있습니다. 트래버스는 미국적인 것을 대부분 증오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낯가림이 심하며 까다로운 독신 여성 트래버스와 달리 디즈니는 과시적이며 사교적인 기혼 남성입니다. 트래버스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가이지만 디즈니는 부유한 사업가입니다. 트래버스는 가족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를 꺼려 하지만 디즈니는 딸과의 약속을 반복적으로 입에 올리며 ‘메리 포핀스’의 판권을 구입하려 합니다. 트래버스는 수완을 자랑하는 디즈니를 배금주의자로 경멸하며 자신의 캐릭터의 판권을 넘기기를 꺼려합니다. 원작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원작자와 영화 제작자의 필연적 갈등이기도 합니다. 트래버스는 디즈니의 전통인 뮤지컬과 애니메이션을 혐오하지만 디즈니는 결국 애니메이션이 삽입된 뮤지컬로 영화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원작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려는 원작자와 흥행을 위해 변형하려는 영화 제작자의 갈등은 원작이 존재하는 영화화의 경우 피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세 부녀 관계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는 아버지와 딸에 관한 영화입니다. 트래버스는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아버지의 영향을 담뿍 받았습니다. 그녀가 회전목마에 탑승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에서 백마를 떠올리고 과일 배를 싫어하며 모두가 술을 마시는 바에서도 차를 주문하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로 단명했던 트래버스의 은행원 아버지(콜린 패럴 분)를 모델로 한 인물이 ‘메리 포핀스’에서 두 아이의 아버지 조지 뱅크스, 즉 미스터 뱅크스입니다. ‘Banks'라는 이름부터 그가 은행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인 취향의 영화에서 강인한 배역을 주로 맡아왔던 콜린 패럴은 마치 조니 뎁을 연상시키는 자상하면서도 엉뚱한 몽상가를 연기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1906년의 회상 장면이 교차 편집되면서 트래버스의 어린 시절이 ‘메리 포핀스’의 동화 집필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암시됩니다. 특히 술에 만취한 트래버스의 횡설수설 연설과 ‘메리 포핀스’의 뱅크스에 관한 노래를 교차 편집하는 장면은 절묘합니다. 본명이 헬렌 린든 고프인 그녀가 필명을 트래버스라 짓게 된 연원도 아버지의 이름 트래버스 로버트 고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메리 포핀스’에 등장하는 타이틀 롤 메리 포핀스는 엘리 이모(레이첼 그리피스 분)에서 착안했음이 드러납니다.

서사의 큰 줄기와는 무관한 듯한 트래버스의 운전기사 랄프로 중량감 있는 배우 폴 지아매티가 캐스팅된 것도 또 다른 부녀 관계를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수다스럽고 경박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랄프는 자신의 장애인 딸이 ‘메리 포핀스’를 좋아하며 자신도 즐겁게 읽었다고 털어놓습니다. 딸을 아끼는 랄프에 대해 트래버스는 ‘유일하게 좋아하는 미국인’이라며 극찬합니다.

딸과의 20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메리 포핀스’를 영화화하겠다는 디즈니 부녀 관계 또한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어쩌면 트래버스는 몽상적인 디즈니로부터 자신의 아버지를 겹쳐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디즈니 또한 ‘메리 포핀스’의 영화화 과정에서 트래버스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뱅크스에 콧수염 등 자신의 이미지를 삽입하려 합니다.

아버지 구하기

영화 제목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Saving Mr. Banks)’는 ‘미스터 뱅크스 구하기’로 해석될 수 있는데 역시 톰 행크스 주연의 1998년 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를 연상시킵니다.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의 제목의 의미는 원작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뱅크스를 영화화 과정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꿔 까다로운 성격의 트래버스가 아버지에 대한 아픈 추억을 치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캐릭터를 구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작가를 구원하게 되는 셈입니다.

서두와 결말에 로버트 쉐만의 동요 ‘종소리’가 삽입되며 엔딩 크레딧에는 트래버스가 디즈니의 제작진과의 회의했던 육성이 실제 녹음테이프로 제시됩니다. 현재의 매끈한 이미지와는 다른, 20세기 중반의 다소 어설픈 감각으로 재현된 미키 마우스를 비롯한 디즈니의 유명 캐릭터들의 봉제 인형 및 마스코트 탈과 의상, 그리고 당시의 디즈니랜드도 눈요깃거리입니다. 영화 초반 트래버스는 호텔방에 가득한 디즈니 캐릭터의 봉제 인형 중 원작자가 판권을 판매한 캐릭터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잔잔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갖춰 125분의 러닝 타임이 지루하지 않지만 디즈니가 런던으로 찾아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트래버스를 설득하는 장면은 배우의 연기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호흡이 길어 아쉬움을 남깁니다. 주제의식을 함축하며 디즈니가 트래버스를 설득하는 중요한 장면이지만 보다 간결하게 대사를 압축하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http://twitter.com/tominodij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