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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 사랑의 기억마저 잊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 영화

※ 본 포스팅은 ‘동사서독’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뒤로 한 채 사막에서 살인청부업에 종사하는 무사 구양봉(장국영 분)은 친구 황약사(양가휘 분)가 1년에 한 번씩 자신을 만난 뒤 다른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눈치 챕니다. 황약사는 과거를 잊을 수 있는 술 취생몽사를 권하지만 구양봉은 받지 않습니다.

8명의 등장인물, 몽환적으로 뒤얽히다

1994년 작 ‘동사서독’은 왕가위 감독의 중화권 연출작 중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무협 영화입니다. 김용의 무협 소설 ‘사조영웅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젊은 시절을 왕가위가 자유롭게 각색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완성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을 살 정도로 제작 기간이 길어졌습니다. 촬영 도중 각본을 갈아엎고 배역이 뒤바뀌는 등 혼선이 초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본편에 등장하지 않았던 왕조현이 결말에서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유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어렵사리 완성된 ‘동사서독’은 100분의 길지 않은 러닝 타임 속에서 중화권의 스타들이 총출동해 무려 8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절묘한 편집을 바탕으로 영화를 지배하는 술 취생몽사처럼 애매모호하면서도 몽환적으로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는 뒤얽힙니다.

서독/구양봉은 질투심이 많으며 동사/황약사는 바람둥이이고 훗날 북개가 되는 홍칠(장학우 분)은 풋내기입니다. 황약사와 바람을 피운 아내 도화(유가령 분)가 있는 고향으로의 귀향을 갈망하는 맹인 검객(양조위 분)은 돈이 필요해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마적대와 맞붙습니다. 황약사로부터 버림받은 모용연/모용언(임청하 분)은 이중인격에 시달리고 소녀(양채니 분)는 계란을 품삯으로 억울하게 죽은 동생의 원한을 갚을 무사를 찾습니다.

버림받기 전에 먼저 버린다

시대는 과거로, 공간은 사막으로 설정해 왕가위의 작품 중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동사서독’이지만 주제 의식은 ‘아비정전’을 비롯한 기존의 필모그래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기 전에 먼저 버린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동사서독’의 주제의식이 실질적으로 가장 늦게 등장하는 구양봉의 형수 역을 맡았으며 왕가위 영화의 여신이라 할 수 있는 장만옥의 입을 통해 롱 테이크로 직접 제시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웅장한 테마를 이 장면에서 중국의 전통 악기를 활용해 구슬프게 편곡해 삽입하며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간접적이며 세련된 연출을 강조하는 현대의 영화 문법에서 주제의식을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롱 테이크로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연출은 원론적으로는 어색하며 촌스러운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전까지 등장한 7명의 인물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가슴 아픈 에피소드들로 인해 형수의 입을 통한 주제의식의 직접적 제시가 전혀 어색하거나 촌스럽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사서독’은 놀라운 영화입니다.

덧붙여 형수는 구양봉을 먼저 버렸지만 결코 승리한 것이 아니며 행복해지지도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사랑보다 자존심을 앞세워봤자 무의미하다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형수는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외아들을 남긴 채 요절합니다.

왕가위는 한 발을 더 나갑니다. 취생몽사로 대변되듯 인간은 아픈 사랑의 기억을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과연 사랑의 기억을 잊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묻습니다. 누군가와 사랑한 뒤 이별한다면 남는 것은 기억뿐이며 그 기억마저 잃으면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사서독’는 외형적으로는 무협 사극이지만 사실은 사랑 영화입니다.

마적대와 맞서는 황약사, 맹인 검객, 그리고 홍칠

사막의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협 액션은 양의 측면에서는 많지 않지만 질의 측면에서는 크게 두드러집니다. 동사와 서독을 소개하는 서두에서 동사/황약사와 마적대 두목이 함께 입을 벌리는 장면은 유머러스합니다. 마적대 두목은 홀로 선 황약사를 얕보며 가려운 입가를 긁기 위해 입을 벌리지만 황약사는 온힘을 다해 마적대를 일격에 섬멸하고자 입을 벌려 기합을 넣습니다. 황약사의 칼은 지축을 뒤흔들고 마적대는 괴멸합니다. 강렬한 서두입니다.

마적대가 복수를 위해 재출현했을 때 나서는 것은 귀향 비용이 절실한 맹인 검객입니다. 하지만 구양봉의 냉정한 평가대로 맹인 검객은 한물 간 무사입니다. 일격으로 수십 명의 마적대를 한꺼번에 거꾸러뜨린 황약사와 달리 맹인 검객은 마적들을 한 명 한 명 상대합니다. 최고수 황약사에 비해 맹인 검객은 하수임을 알 수 있는 설정입니다. 해가 구름에 가려 시야를 확보하지 못해 더욱 불리해진 맹인 검객은 왼손이 재빠른 마적에 의해 죽음을 맞습니다.

맹인 검객과 마적대의 혈투가 슬로모션으로 느릿느릿 전개되는 것은 맹인 검객이 예정된 죽음을 향해 고통스럽게 떠 밀려가기 때문입니다. 왕가위의 페르소나 양조위의 허무한 표정 연기는 강한 잔상을 남깁니다. ‘타락천사’에서 과장(이가흔 분)의 배신으로 일대다수의 불리한 혈투에 임하다 슬로 모션으로 느릿느릿 전개된 장면 끝에 죽음을 맞이하는 킬러(여명 분)와 마찬가지입니다. 맹인 검객과 킬러는 패배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불리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임했다는 점과 죽음을 맞이한 뒤 유언을 내레이션으로 삽입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맹인 검객 최후의 결투에 삽입된 비장미 넘치는 배경 음악은 ‘동사서독’ 개봉 당시 OST에는 포함되지 않아 진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맹인 검객의 뒤를 이어 마적대와 맞서는 것은 홍칠입니다. 구양봉은 저돌적인 홍칠이 과거의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맹인 검객의 시체를 놓고 홍칠에게 마적대와 맞서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홍칠의 결투는 서두에서 제시되는 구양봉의 결투처럼 재빠릅니다. 홍칠의 삶에 대한 충만한 의욕이 결투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 느릿느릿 밀려가는 맹인 검객의 결투와는 정반대입니다. 마적대를 상대하는 황약사, 맹인 검객, 그리고 홍칠의 결투 방식의 차이는 그들의 무공은 물론 삶에 대한 자세의 차이마저 드러냅니다.

홍칠은 마적대를 물리친 것에 만족하지 않고 품삯이 계란에 불과한 소녀의 복수를 대신하다 손가락을 잃습니다. 아내와 동행하는 홍칠이 소녀의 복수를 대신한 것은 소녀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무공에 대한 자만심과 이름을 얻겠다는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습니다. 좌충우돌의 대가로 손가락을 잃은 홍칠은 구양봉의 곁을 떠납니다. 훗날 북개가 되는 홍칠은 젊은 시절 멋모르는 풋내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여전한 왕가위 영화의 요소들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동사서독’은 매우 현대적인, 영락없는 왕가위 영화입니다. 구양봉과 형수의 관계는 ‘아비정전’에서 두 배우가 맡았던 아비와 수리챈의 관계처럼 사랑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한 것과 유사합니다. ‘아비정전’에서 눈치 없는 아비의 친구로 등장했던 장학우의 좌충우돌은 ‘동사서독’에서도 이어집니다.

도화가 말 위에서 자위하는 에로틱한 장면은 ‘타락천사’에서 과장이 킬러의 집 침대 위에서 자위하는 장면과 동일합니다. 맹인 검객과 도화는 부부로 등장하는데 양조위와 유가령이 오랜 기간 동거했으며 2008년에 결혼했음을 감안하면 의도적인 캐스팅으로 보입니다.

구양봉의 거처에 있는 새장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는 ‘해피 투게더’의 이구아수 폭포를 모티브로 한 전등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해피 투게더’의 이구아수 폭포가 뒤얽힌 사랑으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하는 반면 ‘동사서독’의 새장은 지나간 사랑의 굴레에 갇힌 인물들의 심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남자 모용연과 여자 모용언으로 이중인격에 시달리는 임청하의 연기는 ‘동방불패’의 타이틀 롤로 남자에서 여자가 된 동방불패를 연상시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지하기보다는 실소를 자아내는 측면도 있어 ‘타락천사’에서 실연으로 인해 광기에 시달렸던 체리(양채니 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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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동사서독 2013/12/06 15:31 #

    일본영화 아들을 동반한 검객에 나왔던 대사를 양조위의 입을 통해 내뱉는 것도 인상적이지요.
    요 캐스팅을 고스란히 가지고 만든 괴작 동성서취도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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