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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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 고통스럽고 행복한, 사랑 영화

※ 본 포스팅은 ‘화양연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62년 유부남 차우(양조위 분)와 유부녀 수리챈(장만옥 분)은 우연히 한날한시에 이사해 이웃이 됩니다. 자신들의 아내와 남편이 불륜에 빠지자 괴로워하던 차우와 수리챈은 서로에 의지하다 사랑에 빠집니다.

최근 재개봉된 왕가위 감독의 2000년 작 ‘화양연화’는 배우자의 불륜이라는 동병상련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는 줄거리의 로맨스 영화입니다. 극중에서 머리를 기름에 발라넘기고 잘 차려 입은 양조위의 모습은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에 대사도 없이 잠시 등장해 궁금증을 증폭시킨 양조위의 훗날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냇 킹 콜의 ‘Quizás, Quizás, Quizás’를 비롯한 나른한 배경 음악들 또한 ‘아비정전’과 분위기가 흡사합니다.

수리챈과의 공통된 취미로서 두 사람이 밀회를 즐기는 호텔방 2046호를 제공하기도 하는 차우의 무협 소설 집필은 후속편 ‘2046’으로 연결됩니다. 무협 소설이라는 소재는 왕가위의 2편의 무협 영화 ‘동사서독’과 ‘일대종사’를 연상시킵니다.

먼저 불륜에 빠진 차우의 아내와 수리챈의 남편은 목소리로만 등장합니다. 대신 초점은 철저히 차우와 수리챈에게만 집중합니다. 차우와 수리챈은 자신들의 배우자가 어떻게 불륜에 빠졌는지 흉내 내며 가까워집니다. 수리챈은 차우를 놓고 남편의 불륜을 추궁하는 연습을 하고 이별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수리챈은 차우와의 이별 연습조차 매우 힘겨워합니다.

왕가위 특유의 미니멀리즘에 입각해 등장인물의 숫자가 많지 않은 것처럼 시공간적 배경 또한 한정적입니다. 낮의 실외를 배경으로 한 장면은 없습니다. 낮 장면은 사무실, 비좁은 집과 같이 철저히 실내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실외 장면은 밤만을 제시합니다. 어둡고 우울한 영화의 분위기는 시공간적 배경만으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차우와 수리챈의 집과 그들이 즐겨 들르는 국수집은 1층이나 평지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비좁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두 주인공이 마주치며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제시하기 위함이지만 폐소공포증을 자극할 정도로 협소한 공간입니다. 그들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은 슬로 모션으로 제시되는데 삶의 고통스런 굴곡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탁 트인 실외 공간은 이별을 연습하며 폭우가 내리는 건물의 낡은 외벽 정도에 불과합니다.

미장센 또한 벽이나 커튼과 같은 장애물을 놓고 두 주인공을 엿보는 듯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코 떳떳해 질 수 없는 차우와 수리챈의 숨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자신들의 배우자와는 다르다며 항변하고 섹스에는 이르지 않았음을 암시하지만 (두 주인공이 섹스하려다 포기하며 자신들의 배우자를 놓고 ‘그들은 이걸 어떻게 했지?’라며 의아해하는 삭제 장면이 dvd 부가 영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위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소문에 힘겨워 합니다. 수리챈과 함께 근무하는 사장조차 자신이 불륜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수리챈에게 사적인 심부름이나 거짓말을 지시하지만 수리챈이 불륜에 빠지자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중적 태도를 드러냅니다.

결말에서 차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의 벽 구멍에 대고 말한 뒤 메웁니다. 그에 앞서 언급된 나무의 구멍에 대고 비밀을 말한 뒤 돌로 메우는 풍습을 변형한 것입니다. 홍콩에서 먼 캄보디아에서 자신의 옛사랑을 고백해야 할 만큼 차우는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녹음기에 대고 흘러간 사랑을 말하다 흐느낀 양조위가 등장하는 ‘해피 투게더’의 장면을 계승했으며 사원의 벽에 대고 장쯔이가 한풀이하는 ‘일대종사’로 계승된 바 있습니다.

수리챈이 근무하는 사무실에 보이는 큼지막한 지멘스의 아날로그시계는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 투게더’ 등에 등장한 각양각색의 시계들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소품입니다. 즉 매일 반복되는 듯한 일상의 시간이 실은 화살처럼 흘러가고 있으며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주선의 노래 ‘화양적연화’에서 비롯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뜻하는 제목 ‘화양연화’는 ‘구름 사이로 언뜻 비친 봄 햇살’을 의미하는 ‘해피 투게더’의 홍콩 개봉 제목 ‘춘광사설’과 동일하게 무미건조한 인생에서 잠시 만난 짧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택시 안에서 장만옥이 양조위의 어깨에 기대는 장면은 ‘해피 투게더’에서 택시 안에서 장국영이 양조위의 어깨에 기대는 장면을 반복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즐겨먹는 국수는 차우의 입장에서는 아내가 외도를 하며 집을 비우기에 차려주는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먹는 음식이며 수리챈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외도를 하며 집을 비우기에 요리를 하고 싶지 않아 사먹는 음식입니다. 두 사람이 방안에 갇히는 장면에서도 함께 먹는 음식은 국수입니다. 국수집 계단과 국수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차우와 수리챈은 고통스러운 사랑 속에서 결과적으로 행복했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결합하려 하지만 어긋납니다. 자신들의 배우자와도 재결합하지 못한 두 사람은 각자 홀로 남습니다. 장만옥이 선보이는 다양하고 화려한 치파오처럼 두 주인공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왕가위의 영화들이 그러하듯 결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는 못합니다.

아비정전 - 왕가위 월드의 원형
중경삼림 - 도시적이고 쿨한 감수성
중경삼림 - 12년 만에 필름으로 재회한 인생의 영화
중경삼림 - 왜 우리는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타락천사 - 우울과 고독 속으로 침잠하다
타락천사 - 헤어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잊혀지는 것
해피 투게더 - 아휘, 다시 시작하자
화양연화 -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2046 - 엇갈린 사랑의 공허함
2046 - 두 번째 감상
2046 - 세 번째 감상
2046 - 네 번째 감상
에로스 - 세 편의 알듯 말듯한 사랑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배경만 바꾼 왕가위의 동어반복
일대종사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홍콩
일대종사 - 7번의 기념사진, 그리고 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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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정라희 2014/03/02 20:47 # 삭제

    잘읽고 갑니다. 오늘에서야 화영연화를 보았는데, 분위기도 분위지만, 중간중간 편집이 신기한 반면, 무엇을 뜻하는지 굉장히 난해하더군요. 두 사람의 마음이 대사보다 전체적인 배경과 흐름으로 읽히는 굉장히 독특한 영화였네요
  • 비비 2014/04/16 21:23 # 삭제

    잘 읽었습니다. 읽고나니 왕가위 감독 작품의 흐름이 잘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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