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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 영혼 없는 자본주의 빗댄 범죄 서사시

※ 본 포스팅은 ‘백야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슈에이샤의 잡지 ‘소설 스바루’에 연재한 분량을 1999년에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한 장편 소설입니다. 1973년부터 1992년까지 19년 동안 지능적 범죄 행각을 벌이는 두 주인공 료지와 유키호를 85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묘사하는 범죄 서사시입니다.

오사카 출신의 소년 료지와 소녀 유키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 뒤 범죄자의 길로 접어듭니다. 부모의 죽음은 두 주인공에 의한 원한에 의한 살인임이 훗날 밝혀집니다. 어머니 후미요는 초등학생 딸 유키호를 매춘으로 내몰았고 료지의 아버지 요우스케는 유키호를 버려진 건물에서 성폭행하려다 료지의 의해 살해됩니다. 후미요 역시 살해됩니다. 요우스케와 후미요는 인간 이하의 죄인이었습니다.

섹스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료지와 유키호는 성인이 되어서도 정상적인 성생활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에서 암시하듯 료지와 유키호 역시 정상적인 섹스가 불가능한 욕구 불만을 범죄를 통해 해소하려 했다고도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제목 ‘백야행(白夜行)’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존속 살해 이후 항상 백야를 가는 것과 같은 삶을 두 주인공이 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를 살해해 정신이 황폐해진 료지와 유키호는 강한 유대의식을 지닌 동반자가 됩니다. 중학교 재학 시절 뜨개질한 주머니에 박힌 이니셜 ‘RK’는 유키호가 친구 에리코에게 변명하듯 양모 카라사와 레이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키리하라 료지를 의미합니다. 아울러 유키호가 도쿄에서 창업해 오사카까지 확장한 고급 옷가게 ‘R & Y’ 또한 료지와 유키호의 이니셜에서 따온 것입니다. ‘R & Y’ 오사카 1호점은 료지와 유키호의 금의환향이 될 뻔하지만 파멸의 장소로 돌변합니다. 고향 오사카에서 시작해 수도 도쿄를 돌아온 두 사람이 고향에서 파국을 맞이한 것입니다.

‘백야행’의 최대 특징은 주인공 료지와 유키호의 시점은 단 한 번도 제시되지 않으며 심리 묘사 또한 최대한 자제한다는 점입니다. 료지와 유키호의 행각은 그들의 지인과 그들의 범죄를 추적하는 형사 및 사립탐정에 의해서만 묘사됩니다. 료지와 유키호가 주변 인물들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장면이 최대한 자제되어 있어 유추 외에는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범죄 동기 또한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고교 동창생이자 동업자인 토모히코에게 간간이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으며 동거녀 노리코와 오사카를 함께 여행해 사건 해결에 실마리를 제시한 료지와 달리 유키호는 제대로 된 친구조차 없어 내면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토모히코와 노리코에게만큼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은 료지와 달리 유키호는 친구를 비롯해 가까운 여성들의 성폭행을 교사하고 양모 레이코의 살해를 교사합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유키호의 주변 여성들은 유키호의 질투와 증오에 의해 모두 불행해집니다. 두 번이나 결혼하고 네 개의 성(姓)을 가지게 된 유키호가 사업적 필요나 유키호의 청부에 의해 살인을 일삼은 료지보다 오히려 더욱 악질적인 인물로 보입니다.

결말에서 료지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유키호는 살아남는 것 또한 두 사람의 인간관계의 차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는 료지보다 살아남는 유키호가 더 불행한 파국을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은 유키호의 후일담은 어찌 되었을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료지와 유키호의 심리 묘사의 정도 차이는 작자 히가시노 게이고가 남자이기 때문에 료지의 심리 묘사가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키호가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료지가 철저히 음지에서 활개를 치는 것과 달리 유키호는 음지에서 악행을 벌이면서도 양지를 지향하며 유력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고 외형적으로 번듯한 사업을 했던 것과도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두 주인공이 왜 동거나 결혼의 형태로 함께 살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지만 료지와 유키호의 사회를 향한 인식과 행보의 차이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료지는 사회에서 번듯하게 성공하겠다는 인식이 전무했던 반면 유키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식과 사업 등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겠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유키호는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내면을 알 수 없으며 범죄를 통해 부를 축적한 료지와 유키호는 그들이 살았던 일본의 고도 자본주의 즉, 버블 경제의 추악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외형적으로는 화려하지만 내면은 공허하며 곪아터졌던 일본의 버블 경제는 외모는 더 할 나위 없는 미인이지만 내면은 추악했던 팜므 파탈 유키호와 닮았습니다.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또한 영혼이 없는 자본주의를 빗대기 위한 의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버블이 붕괴된 뒤 료지와 유키호 또한 파멸을 피하지 못하는 것 또한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입니다.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게임 ‘슈퍼 마리오’, 일본 프로야구와 스모, 그리고 패션을 비롯한 다양한 유행 등을 삽입해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한 흔적도 역력합니다.

20세기 후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범죄 서사시이기에 범죄의 변천사도 엿볼 수 있습니다. 초창기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기업 간의 네트워크에 대한 해킹에 이르기까지 료지가 획책하는 컴퓨터 범죄는 날이 갈수록 기술적 수준이 향상됩니다. 물론 범죄를 추적하는 수사 기술 또한 진화합니다. 범죄 기술의 진화와 그에 맞서는 수사 기술의 진화 과정도 ‘백야행’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특유의 간결한 문체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는 난해한 컴퓨터 범죄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해커의 경우 컴퓨터로 저지르는 범죄에는 익숙하지만 몸을 쓰는 폭력 범죄 등에는 능숙하지 못한 경우가 일반적인데 료지는 해커이면서도 납치, 성폭행, 살인 등에 익숙하다는 점입니다. 범죄자의 측면에서는 완전체에 가까운 료지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의도적인 작명이 엿보입니다. 주인공 료지와 그의 아버지 요우스케의 성 키리하라[桐原 ; きりはら]는 베다[切 ; きる]와 배[腹; はら]의 합성어의 동음이의어로 부자가 동일하게 배를 찔려 죽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료지는 2층에서 1층으로 추락하는 와중에 소지하고 있던 가위에 찔려 죽는데 추락에 의한 사망은 느와르 악역 주인공의 전형적인 죽음의 방식입니다. 고교 동창생으로 료지가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사업도 물려준 유일한 친구 토모히코[友彦]의 이름에 친구를 의미하는 ‘友’자가 포함된 것도 당연히 의도적인 작명으로 보입니다.

한편 유키호[雪穂]의 이름의 ‘雪’은 그녀의 눈처럼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외모를 상징합니다. 유키호와 재혼한 야스하루의 집 가정부인 타에코[妙子]는 참다[たえる]의 동음이의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정부란 참아야 하는 일이 많은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권말의 ‘해설’입니다. 소설가 하세 세이슈의 ‘해설’은 길고 치밀한 ‘백야행’에 대한 찬탄으로 가득할 뿐 작품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부분은 크게 부족합니다. 함량 미달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 - 추리소설 뛰어넘은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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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모르세 2013/10/26 13:52 # 삭제

    잘보고 갑니다.즐거운 주말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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