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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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 7번의 기념사진, 그리고 궁이 영화

‘일대종사’는 7번에 걸쳐 기념사진 촬영 장면을 제시합니다. 엽문(양조위 분)과 아내 장영성(송혜교 분)의 사진, 궁보삼(왕경성 분)의 은퇴식 기념사진, 엽문 부부와 어린 자식들의 가족사진, 엽문의 집을 점령한 일본군의 기념사진, 일선천(장첸 분)과 이발소 부하 직원들의 기념사진, 홍콩 국적을 취득한 엽문의 신분증용 독사진, 그리고 엽문이 어린 소년을 비롯한 제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마지막 장면까지입니다.

기념사진 촬영 장면이 다수 삽입된 것은 ‘일대종사’가 왕가위 영화 최초로 질곡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을 소재로 선택한 것과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기념사진 촬영 장면을 통해 ‘일대종사’가 사실에 기초했음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에 부화뇌동하는 마삼(장진 분)과 협조하지 않는 엽문을 대비시키는 것은 물론 ‘북방과 남방은 하나다’라며 양안으로 분리된 중국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는 메시지까지 한편으로는 최근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중화권 영화들과 맥락을 같이해 비정치적인 공간에 머물러왔던 왕가위의 전작들과 차별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찰나에 스쳐 시간의 흐름에 묻혀간 옛 인연을 소중히 하는 왕가위 영화의 일관된 주제 의식과 기념사진 촬영 장면은 일맥상통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 엽문을 제외하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등장인물 궁이(장쯔이 분)는 7번에 걸친 기념사진 촬영 장면에 한 번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빙긋이 웃음 짓는 것 외에는 표정으로 자신감을 드러내지 않아 과묵한 엽문과 달리 호승심 넘치며 자존심 강한 궁이에게 기념사진 촬영이 할애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사망한 궁이는 추억의 여인이기에 기념사진은 어울리지 않기도 합니다.

간접적으로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기념사진 촬영 장면에서 배제된 대신 궁이는 엽문과의 대화를 통해 ‘일대종사’의 주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장면의 주인공이 됩니다. ‘삶에 후회가 없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어요?’라며 엽문을 한때 마음에 담았음을 털어놓는 장면과 뒤이어 밤거리에서 기루를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장쯔이의 회한과 쓸쓸함이 뒤섞인 표정 연기는 압권입니다.

배우들의 얼굴 클로즈업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손의 클로즈업 또한 인상적입니다. 장영성이 엽문을 위해 불을 밝히는 손, 엽문이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기루에서 음식을 받아가는 손, 그리고 일선천이 궁이의 모피 코트를 어루만지는 손은 무술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사랑, 안타까움 등 많은 정서를 함축합니다.

격투 장면 직전 두 무술가가 서로를 마주보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은 서부 영화의 결투 장면 직전의 긴장감을 떠올리게 합니다. 엽문과 일선천의 각각 격투 장면은 폭우가 몰아치는 밤거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엽문의 격투는 느릿느릿 전개되는 반면 일선천의 격투는 빠르게 전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동사서독’의 오프닝을 장식했던 동사(양가휘 분)의 사막 격투 장면은 느리게 제시된 반면 서독(장국영 분)의 실내 격투 장면은 빠르게 제시되어 대조적이었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일선천의 격투 장면을 제외하면 ‘일대종사’는 결코 속도감 넘치거나 화려한 영화는 아닙니다. 1988년에 연출한 데뷔작 ‘열혈남아’ 이후 1990년대에 연출한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에 이르기까지 왕가위의 영화들은 나른함 속에서도 폭발력과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작 ‘화양연화’ 이후 ‘2046’과 ‘일대종사’까지 폭발력과 유머 감각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습니다. 2000년대 들어 과작이 추세가 된 왕가위의 영화가 한 편 드문드문 개봉할 때마다 팬들에게는 축제와도 같지만 1958년생으로 50대 중반에 접어든 왕가위가 어딘지 모르게 지친 노회한 거장으로 자리 잡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아쉽습니다.

유장함을 강조하는 현악기 위주의 배경 음악과 오페라의 아리아는 ‘2046’과의 공통점입니다. 궁보삼의 은퇴식 장면에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분한 차우의 늙은 동료였던 아핑 역의 소병림이 카메오로 등장합니다. 궁보삼의 은퇴식의 공간적 배경이 된 기루에서 종사하는 여인들의 화려한 치파오 역시 ‘화양연화’를 연상시키며 남성 무술가들의 단조로운 검정색 옷차림과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엔드 크레딧의 스태프 중에는 이름에 네모로 강조된 인물들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국내에는 122분의 러닝 타임으로 개봉되었지만 중국과 프랑스에서는 130분, 일본에서는 123분의 러닝 타임으로 공개되었는데 편집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한국에 보다 짧은 버전이 개봉된 것은 분명 아쉽습니다. 영어 제목은 ‘The Grandmaster’이지만 복수형인 ‘The Grandmasters’로 표기된 포스터가 존재하는 이유 또한 궁금합니다.

일대종사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홍콩

아비정전 - 왕가위 월드의 원형
중경삼림 - 도시적이고 쿨한 감수성
중경삼림 - 12년 만에 필름으로 재회한 인생의 영화
중경삼림 - 왜 우리는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타락천사 - 우울과 고독 속으로 침잠하다
타락천사 - 헤어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잊혀지는 것
화양연화 -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2046 - 엇갈린 사랑의 공허함
2046 - 두 번째 감상
2046 - 세 번째 감상
2046 - 네 번째 감상
에로스 - 세 편의 알듯 말듯한 사랑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배경만 바꾼 왕가위의 동어반복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cinekiru 2014/02/07 22:28 # 삭제

    일대종사 버전 관련해 댓글 달아요~ ^^

    일대종사는 현재 세가지 판본이 있다고하네요. 인터내셔날판(122분), 홍콩판(130분), 북미판(108분)이라고 합니다.

    여튼 홍콩판 블루레이를 빌려서 현재 상영중인 인터내셔날판과 비교해본 결과 여러 부분이 추가되거나 안들어가거나 차이가 나네요.

    일단 홍콩판에는 국내판에 없는 장면 중에 기억나는게 궁이가 죽었다는 문구가 나온 뒤에 원숭이 어깨 아저씨가(궁이와 함께 다니는) 엽문에게 궁이의 머리카락 태운 통을 주는 영상이 나옵니다. 아저씨가 엽문에게 궁이 이야기 하면서 주는데 엽문 얼굴이 참 슬프네요.

    또 인터내셔날판에는 궁이가 어렸을적에 이버지의 무술을 보면서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홍콩판에는 다 빠져있네요. 그냥 그 부분에는 현재 궁이가 눈밭에서 무공 연습하는 장면으로 대체되어있습니다.

    다음으로 홍콩판에는 엽문이 공이에게 단추를 주고 난 뒤에 다른 영상이 하나 나오는데 엽문이 궁선생의 사형을 만나는 장면도 들어있습니다. 둘이 대화를 하면서 궁선생의 사형이 엽문에게 담배불 붙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참 멋지네요.

    그리고 인터내셔날판 엔딩은 제자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나는데 홍콩판은 이 장면이 빠져있으며 궁이가 머리카락을 태운 절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납니다.

    큰 부분은 저 정도고 군데군데 편집이 다르네요. 홍콩판이 조금씩 더 보여주는 반면 긴거도 있고 짧은것도 있구요. 여튼 세가지 판본을 전부 블루레이로 만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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