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에 개봉된 할리우드 진출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로부터 6년, 그리고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연출한 2004년 작 ‘2046’으로부터는 9년 만에 왕가위가 장편 영화 ‘일대종사’로 돌아왔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스승’을 뜻하는 ‘일대종사’는 엔드 크레딧 직전 자막을 차지하는 대배우 이소룡의 스승이자 영춘권의 고수였던 실존 인물 엽문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신산스러움 삶을 묘사합니다.
차우의 연애 행각을 중심으로 ‘화양연화’와 ‘2046’은 전편과 속편으로 나누어진 서사시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등장인물의 흥망성쇠와 생사를 묘사한 ‘동사서독’ 역시 서사시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대종사’는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서사시라는 점에서 왕가위의 전작들과는 구분됩니다. 엽문은 일제의 침략과 중국 대륙의 공산화 등 질곡의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경험합니다. 왕가위 영화의 주된 정서를 이루는 인생과 사랑의 덧없음과 세월 속에 묻힌 과거에 대한 아련한 향수는 ‘일대종사’에서도 여전합니다.
무술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인연을 맺어 사랑하고 이별하며 때로는 철전지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궁이와 일선천(장첸 분)이 결혼을 약속하고도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장쯔이와 장첸이 서로 사랑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한 ‘와호장룡’을 연상시킵니다. 장쯔이가 무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 두 배우가 극중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소멸해가는 인연과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담히 표현하는 회고적인 서사시라는 측면에서는 1984년에 공개된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지막 연출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연상시킵니다.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20세기 초중반의 현대사에 투영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마지막 장면이 주인공 누들스(로버트 드니로 분)의 아편 흡연 장면인 것처럼 ‘일대종사’의 여주인공 궁이의 마지막 등장 장면이 아편 흡연 장면입니다. 제자를 두지 않은 궁이가 1953년 사망하면서 궁보삼의 두 유파 중 하나는 대가 끊어지게 됩니다. 일대종사의 영문 제목은 글자그대로 ‘The Grandmaster’이지만 ‘Once Upon a Time in Hong Kong’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적 배경 동안 등장하는 주연 배우들이 나이를 먹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세월을 거치는 엽문과 궁이는 주름살이 늘어가는 듯 보이지만 결코 흰머리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양조위와 장쯔이에 대한 관객들의 환상을 깨뜨리기 싫어서였는지 왕가위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왕가위 영화의 전형적 요소들은 여전합니다. 내레이션에 의존하는 전개, 반복되는 얼굴 클로즈업,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실내 장면, 정교한 카메라 워킹, 꽉 들어찬 미장센 등이 그러합니다.
엽문이 아내의 발을 씻어주며 마사지하는 장면은 ‘중경삼림’을, 아내와 함께 지붕에 올라가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2046’을 연상시킵니다. 양조위와 장쯔이의 인연이 잠시 스쳐갔다는 점 역시 ‘2046’과 닮았습니다. 궁이가 죽은 아버지에게 기원하기 위해 사원의 벽에 대고 말하는 장면은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과 유사합니다.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가는 남녀와 세로로 제시되는 한자 자막 역시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무술 장면 연출은 왕가위의 기존작과는 다릅니다. 왕가위의 유일한 무협 영화였던 ‘동사서독’과는 시대적 배경이 다른 탓도 있지만 ‘일대종사’는 ‘동사서독’보다는 장이모의 ‘영웅’ 등의 연출 방식에 가깝습니다. 엽문과 일선천이 각각 첫 번째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쏟아지는 폭우,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이는 빗물 방울, 가격당하는 사람에 의해 튀어나오는 건물 벽의 나사 및 파편, 산산조각 나는 유리창, 그리고 흩날리는 먼지는 왕가위의 영화보다는 극사실적으로 과장된 중화권 무협 영화의 시류에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궁이와 친일 배신자 마삼(장진 분)의 결투 장면에서 기차가 끝없이 긴 것처럼 연출된 것이나 그에 앞서 강씨(상철룡 분)가 마삼의 부하들에게 칼을 휘두르지만 옷만 베고 부상은 입히지 않는 연출은 중화권 무협 영화 특유의 과장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와이어 액션보다는 등장인물들이 두 발을 땅에 붙이는 장면이 많고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우아하며 절제된 손동작이 강조된다는 점에서는 무술에 능하지 않은 양조위를 배려하려는 의도와 동시에 차별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엽문과 궁이가 무술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사랑의 춤과 같이 연출되었습니다. 무술 감독 원화평이 엽문의 스승으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송혜교는 출연 장면은 많지 않지만 장쯔이보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두 마디밖에 되지 않는 송혜교의 중국어 대사는 어색합니다. 엔드 크레딧 도중에는 본편에 제시되지 않은 엽문의 격투 장면이 추가되었습니다.
‘일대종사’는 매우 실망스러웠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보다는 낫지만 ‘2046’ 이전에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들에 비해서는 부족합니다.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하지만 전반부를 비롯해 전체적으로 다소 지루해 소수만 남은 왕가위의 열렬한 팬을 제외하면 일반 관객에게 호소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한글자막 번역은 이미도가 맡았습니다. 이미도는 주로 영어권 영화들의 번역을 맡아왔는데 ‘일대종사’의 북경어와 광둥어 대사를 제대로 번역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혹시 영어 대본을 중역한 것은 아닌지 의문입니다. 이미도의 한글 자막 중에는 선택을 의미하는 연결 어미 ‘~든지’를 사용해야 할 곳에 막연한 의문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던지’로 잘못 번역한 곳이 두 차례 보입니다.
아비정전 - 왕가위 월드의 원형
중경삼림 - 도시적이고 쿨한 감수성
중경삼림 - 12년 만에 필름으로 재회한 인생의 영화
중경삼림 - 왜 우리는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타락천사 - 우울과 고독 속으로 침잠하다
타락천사 - 헤어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잊혀지는 것
화양연화 -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2046 - 엇갈린 사랑의 공허함
2046 - 두 번째 감상
2046 - 세 번째 감상
2046 - 네 번째 감상
에로스 - 세 편의 알듯 말듯한 사랑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배경만 바꾼 왕가위의 동어반복
http://twitter.com/tominodij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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