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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블루 - 이상향에 대한 남자의 고독한 집착 영화

※ 본 포스팅은 ‘그랑 블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은 잠수부 자크(장 마르크 바 분)는 20년 전 친구이자 잠수 세계챔피언 엔조(장 르노 분)에 의해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잠수 대회에 초청됩니다. 페루에서 자크와 조우해 첫눈에 반한 보험사 직원 조안나(로잔사 아퀘트 분)는 자크를 만나기 위해 시칠리아로 찾아옵니다.

뤽 베송 감독의 1988년 작 ‘그랑 블루’는 바다에 매혹된 두 사나이의 잠수 경쟁을 중심으로 우정과 사랑을 묘사합니다. 주인공 자크는 프랑스인, 연인 조안나는 미국인, 그리고 자크의 친구이자 라이벌 엔조는 이탈리아인으로 세계 각국의 국적을 지니고 있으며 대사는 영어로 처리되었습니다. 공간적 배경 또한 페루, 미국 뉴욕,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 다양합니다. 조안나가 친구와 함께 사는 아파트의 창문 너머로는 9.11 테러 전의 무역센터 빌딩도 보입니다. 엔조는 자국의 국기를 모티브로 한 잠수복을 입고 등장하며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음식 스파게티가 웃음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뤽 베송의 코스모폴리탄적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극중에서는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자크와 엔조의 바다에 대한 집착은 광기에 가깝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록을 넘어서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결하지만 상대를 이기겠다는 호승심보다는 바다에 대한 집착이 보다 강합니다. 자크와 엔조가 친구인 이유도 바다에 대한 집착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인간은 닿을 수 없는 수심 100m가 넘는 깊은 바다에 산소통도 없이 숨을 참고 들어가 자력으로 떠오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도 자크는 ‘바다에 내려갔을 때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지 못 하겠다’고 털어놓습니다. 결국 엔조가 먼저 바다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자크도 뒤를 따릅니다.

‘그랑 블루’는 신화적입니다. 이카루스의 신화를 연상시킵니다. 자크와 엔조가 집착하는 깊은 바다를 향한 잠수는 이카루스가 밀랍으로 붙인 날개로 비행하다 태양에 접근해 밀랍이 녹아 추락사한 그리스 신화와 닮았습니다. 비행은 상승, 잠수는 하강의 이미지이지만 인간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집착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랑 블루’의 바다는 제목 그대로 하늘처럼 파랗기에 잠수는 마치 비행처럼 묘사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상향에 대한 집착은 죽음으로 연결되지만 ‘그랑 블루’는 자크와 엔조가 경쟁하며 치닫는 죽음을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비극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향한 해방으로 묘사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임신조차도 남자의 이상향에 대한 고독한 집착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자크를 둘러싼 삼대의 운명 또한 신화적입니다. 자크의 어머니는 미국인이지만 아버지의 곁을 일찍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잠수 도중 사고로 사망해 자크는 외롭게 자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크는 미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아버지의 운명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외로웠던 자크는 사랑을 통해 위안을 얻지만 결코 영속적일 수 없습니다. 그의 가족은 조안나가 아닌 인어에 비견되는 돌고래이며 그의 집은 뭍이 아니라 바닷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조안나는 자크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 아이 역시 편부모 밑에서 외롭게 자랄 것이며 자크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것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윤회와도 같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대물림됩니다. 극중에 등장하는 3명의 남자 잠수부는 그토록 집착하던 바다에서 모두 최후를 맞이합니다.

어머니는 물론 변변한 연애 경험이 없는 것처럼 암시되는 자크가 사랑에 눈뜨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조안나와 서로 첫 눈에 반한다는 점에서 운명적 사랑이라 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의 첫 섹스에서 자크가 경험이 부족하기에 조안나가 주도하는 여성 상위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결별과 재회를 거치며 두 번째 섹스 장면에서는 자크가 주도하는 남성 상위로 바뀝니다. 자크가 사랑에 익숙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위험에 도전하는 자크는 익숙해지는 것에 견딜 수 없는 남자입니다. 자크를 기다리는 것은 비극적 운명입니다.

‘그랑 블루’의 진정한 주인공은 자크가 아닌 타이틀 롤 바다입니다. 와이드 스크린의 탁 트인 바다는 압도적입니다. 자크와 엔조가 붉은색 잠수복을 입고 푸른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지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매우 강렬합니다. 엔조의 자동차와 모터보트도 붉은색으로 바다와 뚜렷한 대조를 보입니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흡인력이 강해 168분의 러닝 타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에릭 세라의 몽환적이며 상쾌한 음악은 관객으로 하여금 돌고래와 함께 바닷속을 유영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킵니다. 로맨스는 물론 코미디의 요소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캐스팅도 인상적입니다. 아역으로 등장하는 두 사내아이의 이미지는 장 마르크 바와 장 르노와 흡사합니다.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이미지의 로잔나 아퀘트는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을 뿜어내며 엔딩 크레딧의 첫머리를 장식합니다.

최근 개봉 중인 ‘그랑 블루’는 리마스터링 감독판입니다. 1993년 봄 대한극장에서 관람했을 때는 서두의 영화 제목이 ‘THE BIG BLUE’였으며 국내 개봉명은 ‘그랑 부르’였지만 리마스터링 감독판은 ‘Le Grand Bleu’로 다릅니다. 장면의 호흡도 당연히 리마스터링 감독판이 더 깁니다. 1993년에는 120분 분량의 인터내셔널 버전이 국내에 수입된 듯합니다. 당시에는 벨기에인 잠수부가 등장하는 석유시추선 장면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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