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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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림 - 힘 있지만 유치하다 영화

※ 본 포스팅은 ‘퍼시픽 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괴수 ‘카이주’의 습격으로 인류가 위기에 처하자 세계 각국은 기술과 인력을 총동원하며 협력해 카이주와 맞서 싸울 로봇 ‘예거’를 제작합니다. 2명이 일체가 되어 조종하는 예거 ‘집시 데인저’의 파일럿 롤리(찰리 허냄 분)는 카이주와의 대결 도중 형 얀시(디에고 클레이튼호프 분)를 잃고 은퇴합니다. 5년 후 세계 정상들로부터 예거 프로그램의 종료를 통보받자 사령관 스태커(이드리스 엘바 분)는 몇 안 남은 예거를 자의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롤리를 다시 부릅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퍼시픽 림’은 거대 로봇과 거대 괴수의 사투를 묘사하는 SF 영화입니다. 엔드 크레딧에서 1953년 작 ‘심해에서 온 괴물’의 특수 효과를 맡았으며 지난 5월 사망한 레이 해리하우젠과 1965년 작 ‘괴수대전쟁’ 등의 특촬물을 연출한 영화감독 혼다 이시로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퍼시픽 림’에는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합니다.

바닷가에서 출현하는 괴수들의 행태는 쓰나미에 대한 일본인의 공포를 반영한 ‘고지라’를 연상시키며 첫 번째로 등장하는 카이주 ‘나이프헤드’는 1969년 작 ‘가메라 대 대악수 기론’의 기론을 닮았습니다. 홍콩에서 집시 데인저와 사투를 벌이다 갑자기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카이주는 혼다 이시로의 1956년 작 ‘하늘의 대괴수 라돈’의 라돈을 연상시킵니다.

주역 로봇 집시 데인저는 여타 예거들과 달리 아날로그 로봇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슈퍼 로봇 애니메이션이 풍미했던 아날로그 시대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한 향수를 반영한 것입니다. 집시 데인저의 진청색 동체와 힘을 앞세우는 격투 방식은 ‘철인 28호’의 철인 28호를, 슈퍼 로봇의 머리에 해당하는 조종석이 본체와 합체하는 것은 ‘마징가Z’의 호버 파일더와 마징가 Z의 합체를 연상시킵니다.

집시 데인저의 비장의 무기인 체인을 연결한 검은 ‘기갑계 가리안’의 주역기 가리안의 가리안 소드를, 여주인공 마코(키쿠치 린코 분)를 어린 시절에 구출한 코요테 탱고는 ‘태양의 어금니 다그람’의 주역기 다그람을 닮았습니다. 파일럿의 동작을 로봇이 따라 움직인다는 설정은 ‘기동무투전 G건담’의 모빌 트레이스 시스템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 작품 모두 메카닉 디자인에 오오카와라 쿠니오가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장르에 한 획을 그은 것은 물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에반게리온’을 연상시키는 요소들도 있습니다. 예거와 정신적으로 감응해야만 조종할 수 있으며 파일럿의 트라우마가 조종을 가로막는다는 설정, 그리고 헬기로 예거를 운반하는 장면은 ‘에반게리온’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주인공 마코의 단발머리는 아야나미 레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퍼시픽 림’의 일본 개봉용 더빙판에서 마코의 목소리 연기로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의 성우 하야시바라 메구미가 캐스팅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괴수를 일본어 발음 ‘카이주’로 부르는 것이나 일본의 뉴스 방송이 삽입되는 것,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역 여배우 아시다 마나를 캐스팅해 마코의 어린 시절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 일본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20세기 일본 특촬물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도 일본에 대한 경의를 반영한 것입니다. 마코와 스태커가 일본식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주고받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입니다.

일본 특유의 서브 컬처를 할리우드에서 구현한 것은 일본 시장을 노린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주된 공간적 배경을 음침하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홍콩으로 설정해 ‘블레이드 러너’의 아시아의 영향으로 가득한 LA처럼 묘사하고 다수의 엑스트라로 아시아인이 등장하며 기지 곳곳에 한자가 삽입된 것은 중국과 홍콩 등 중화권 시장의 흥행을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과 홍콩에 대한 비중이 높은 것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 관객들의 이국 취향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로봇과 괴수를 미국인의 시각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구현했다는 점에서는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나 실사 영화 ‘고질라’, ‘트랜스포머’, ‘클로버필드’, ‘리얼 스틸’을 계승한 측면도 있습니다.

액션은 크기와 압도적인 힘을 강조합니다. 예거와 카이주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이 많고 예거와 카이주의 발이 차량과 건물 등 인간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실물들을 짓밟으며 무참하게 파괴하는 장면은 ‘퍼시픽 림’이 큰 스케일의 로봇 및 괴수 영화임을 호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액션 장면이 의외로 많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액션은 뉴스나 과거 회상에 삽입된 것을 제외하면 세 장면 정도가 전부입니다. 게다가 연출 방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엇비슷하고 야간과 심해 등 명확하게 디테일을 알아보기 어려운 시공간적 배경에 집중되어 후반에 가면 다소 질립니다.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유의 아기자기함은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실질적인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홍콩 시내의 결투 장면에서 항구 끄트머리에 새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뉴턴의 요람을 활용한 장면의 완급조절이 인상적이지만 전투 장면 자체는 아기자기함이 부족합니다.

‘퍼시픽 림’의 가장 큰 아쉬움은 각본의 구멍과 정서적인 유치함입니다. 로봇과 괴수 모두 감정 이입이 어려운 대상이기에 인간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로맨스, 가족애, 동료애, 비장미를 유발하기 위해 공을 들이지만 유치하고 늘어집니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예상하는 것은 너무나 손쉬울 정도로 진부합니다. 러닝 타임이 132분으로 결코 짧지 않은데 적어도 15분은 들어내며 속도감을 보완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로봇을 도구화, 괴수를 타자화하지 않고 일본의 로봇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이 그러하듯 로봇과 괴수를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 유도하는 편이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롤리의 동료 파일럿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마코밖에 없기에 결론이 뻔하지만 마코가 파일럿이 되기까지 시간을 질질 끕니다.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마코 역의 키쿠치 린코의 대사와 입 모양이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연기가 매우 뻣뻣하고 어색합니다. 마코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아시다 마나의 과장된 연기만도 못합니다. ‘바벨’을 통해 할리우드에 알려졌으며 외모가 서양인이 생각하는 일본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기에 키쿠치 린코가 캐스팅되었는지 모르지만 키쿠치 린코보다 일본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여배우는 일본에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스 캐스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두 명의 박사가 카이주의 뇌와 드리프트해 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는 장면은 코미디의 요소를 마련하기 위함이겠지만 대단치도 않은 정보를 캐기 위해 너무나 많은 비중이 할애됩니다. TV 드라마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로 등장했던 론 펄만이 카이주, 즉 괴수 관련 밀매업자로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우며 카이주의 뼈가 약재로 거래되는 것은 아시아에서 호랑이 뼈가 약재로 밀거래되는 것을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사의 큰 줄거리와 무관한 에피소드와 캐릭터에 지나친 비중이 할애되어 산만합니다. 엔드 크레딧 중간에 추가된 장면 또한 론 펄만의 것입니다. 스태커 역의 이드리스 엘바가 ‘프로메테우스’에서 야넥 함장 역을 맡아 그랬듯이 진중하게 무게중심을 잡아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각본과 연출의 구멍까지 메우지는 못합니다.

차라리 예거가 퇴물 취급받게 된 정치적 배경을 깊숙하게 파고들어 음모론 등을 활용하고 카이주의 세계를 자세하게 묘사해 ‘퍼시픽 림’의 세계관을 풍성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 특유의 호러 영화의 요소도 존재하지만 더욱 파고들어 롤리의 형 얀시가 카이주와 결합해 기괴한 적으로 등장했다면 더욱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헬보이 - 론 펄만의, 론 펄만에 의한, 론 펄만을 위한
판의 미로 - 불쾌하고 끔찍한 정치 영화
헬보이2 - 괴물의 물량공세에 뒷전으로 밀린 지옥소년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2013/07/13 08:5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오오 2013/07/13 08:54 #

    유치하지만 힘이 있죠.
  • GI 2013/07/13 11:53 # 삭제

    재미만 있던데요. 애시당초 이 영화에서 플롯이야기는 너무 기대하면 안되는거죠. 솔직히 딱 기대충족이었습니다.
    일본 원작 애니들- 슈퍼로봇계 나 원조 고질라 (60년대)의 플롯을 충실히 오히려 따른 감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쓸데없는 곁다리나 사이드킥 인물들, 그리고 로맨스 빼고 로봇 대 괴수에만 충실.
    역시 토로다 싶었는데요.
  • 잉그램 2013/07/13 12:38 #

    우리나라는 음모론 같은 좀 무거운 분위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걸 보러오는 사람들은 괴수를 때려잡는 정의의 로봇의 주먹질을 보고 싶지 그런 인간궁상의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을겁니다.
  • LeeChai 2013/07/13 13:32 #

    이런 영화는 좀 정서적으로 유치해도 다 넘어가 줍니다(...)
  • 역사관심 2013/07/13 14:20 #

    유치한게 아니라,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요즘 슈퍼히어로 물들이 어찌 보면 이상하다는 걸 반증해주는 영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슈퍼히어로물에 뭔 복잡한 플롯과 고뇌가 이리 많아~! 라고 일갈하는 듯한 영화.

    좋았습니다. (아 그렇다고 다크나이트류가 싫은건 결코 아닙니다. A는 A의 매력이, B는 B의 맛이 있는거죠).
  • DEEPle 2013/07/14 02:14 #

    그렇게 세계관을 심도있게 나가려면 영화에 담기에는 상영시간이 부족했겠지요. 욕심내서 너무 많은 스토리를 넣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된 영화를 많이 본 경험으로는, 이렇게 반전없는 스트레이트한 영화 한 편도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 미스트 2013/07/16 22:36 # 삭제

    인간들 나오면 갑자기 재미없어지는 영화였죠.
    치우고 쩔어주는 로봇과 괴수나 더 내보내라고!!
  • ㅠㅏ 2013/07/23 22:52 # 삭제

    딱제가느낀 그데로이네요.
    전투씬 너무 알아보기 힘들게 연출해서
    때리는건지 맞고있는건지 잘모르겠고.. 전투전에도 대치상황의 긴장감도 너무 연출 안해주고
    스토리보단 연출보여주기 영화인데.. 전투및 상황 연출이 많이 아쉽습니다.
  • 골로 2013/07/30 12:43 #

    마징가 제트 보던 시절 어떤 철학이나 음모가 있어서 재미났던건 아니죠.그냥 이런로봇물은 때려부수는게 짱입니다 :)
  • ㅇㅇ 2013/09/08 17:58 # 삭제

    애초에 상영시간을 봤을때 이런류의 영화는 기승전결 확실하고 깔끔한 스토리가 훨씬 작품성을 살릴수 있습니다 액션만으로 감동받는다는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해준 영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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