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톨스토이의 동명의 소설을 조 라이트 감독이 영화화한 ‘안나 카레니나’는 1874년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귀족 유부녀의 불륜을 묘사합니다. 버나드 로즈 감독, 소피 마르소 주연의 1997년 작에 이르기까지 이미 10여 차례 넘게 영화화되었던 만큼 조 라이트 감독은 독특한 시도를 통해 차별화를 도모합니다.
이를테면 등장인물들을 연극이나 사이코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소규모의 무대 위에 올려 시선의 집중을 유도합니다. 화려한 무대 위에는 안나와 같은 귀족이 등장해 조명을 받으며 어두운 무대 뒤편에는 평민들이 스태프로서 귀족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 이전의 신분제도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군무를 추는 듯 정지와 움직임을 반복하는 조연 및 엑스트라들의 움직임은 발레나 뮤지컬을 연상시킵니다.
CG를 활용해 연극 무대의 배경이 실사의 배경으로 겹쳐지거나 인물이 속한 공간적 배경이 초현실적으로 건너뛰거나 혹은 장난감 기차에 등장인물이 탑승했다든가 하는 식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장면 전환도 눈에 띕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인 러시아의 곳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한 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물론 고전의 영화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쉬운 지루함을 방지하기 위한 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남성 등장인물들은 마치 책에서 스크린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원작 소설의 이미지를 충실하게 재현되었습니다. 잘 생긴 군인 브론스키, 지루한 관료의 이미지를 주드 로의 탈모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안나가 혐오하는 손마디 꺾는 버릇까지 반영한 카레닌, 통통하며 쾌활해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 스티바, 그리고 원작자 톨스토이의 분신과도 같으며 그의 사자갈기 수염마저 닮게 분장시킨 레빈(돔넬 글리슨 분)에 이르기까지 원작의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한 캐스팅, 의상, 분장, 그리고 연기는 놀랍습니다.
반면 여성 등장인물은 원작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상당합니다. 우선 안나 카레니나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의 미모와 매력은 원작 소설이나 1997년 작의 소피 마르소에 비해 크게 부족합니다.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젊고 잘 생긴 브론스키의 집요한 구애를 받는 안나이지만 키이라 나이틀리의 날카롭고 보이시한 외모는 안나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브론스키 역의 애런 존슨의 미모가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더욱 돋보일 지경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은 ‘오만과 편견’과 ‘어톤먼트’에 이어 다시 한 번 키이라 나이틀리와 호흡을 맞췄지만 타이틀 롤의 캐스팅부터 어긋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제는 극중에서 가장 돋보여야 하는 것이 안나의 미모인 만큼 여타 여배우들의 미모와 매력 또한 키이라 나이틀리에 비해 더욱 처지는 여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반부에 브론스키와 레빈의 구애를 동시에 받으며 삼각관계를 형성할 만큼 청순한 매력을 뿜어내야 할 키티 역의 알리시아 빈칸데르를 비롯해 여배우들이 전반적으로 평범해 매우 허전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약점은 원작이 추구했던 출생, 결혼, 죽음 등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나 19세기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에 대한 고찰이 영화에서는 증발했다는 것입니다. 방대한 분량의 원작 소설의 줄거리를 130분 러닝 타임의 영화로 요약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야말로 안나의 불륜이라는 대강의 줄거리 외에 원작 소설이 지닌 매력과 주제의식을 스크린으로 거의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레빈의 동복형이자 진보적인 정치가인 세르게이 이바니치 코즈니셰프가 등장하지 않았으며 키티 일가의 독일 여행이나 안나와 브론스키의 이탈리아 여행 등 해외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는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특히 브론스키의 자살 기도나 안나의 자살 이후 브론스키가 죽을 곳을 찾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 의용군에 자원한 에피소드 등이 영화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원작의 브론스키의 비중을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브론스키의 도전적인 성격을 대변하며 스펙타클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경마 장면이 너무나 짧고 스케일이 작은 것도 아쉽습니다. 독특한 인생철학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고뇌하는 레빈을 영상으로 옮기는 와중에 비중이 줄어든 것은 차치하더라도 안나가 모든 것을 걸었던 브론스키의 비중이 적으며 그 내면 심리를 제대로 묘사하지 않은 것은 패착이 아닌가 싶습니다.
차라리 러닝 타임을 1시간 정도 늘렸다면 보다 납득할 만한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니나’는 줄거리 요약에 급급해 방대한 고전의 영화화는 애당초 무모한 기획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입증하는 수준에 머물고 맙니다.
안나 카레니나(원작 소설) - 진 주인공은 레빈과 19세기 러시아 사회
어톤먼트 - 누명을 쓴 자와 씌운 자의 치정극
http://twitter.com/tominodij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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