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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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뒷담화와 수작질, 기괴하다 영화

※ 본 포스팅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과 학생 해원(정은채 분)은 캐나다로 떠나는 어머니(김자옥 분)와의 만남 이후 외로움을 참지 못해 결별했던 유부남 연인이자 영화과 강사 성준(이선균 분)과 다시 만납니다. 해원과 성준은 술을 마시러 가지만 같은 과 학생들의 눈에 띄어 어쩔 수 없이 합석하게 됩니다.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담당 강사와 불륜을 유지하는 데 부담을 느끼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여대생의 복잡한 심리를 포착합니다. 제목의 수식어 ‘누구의 딸도 아닌’은 이민가는 어머니와 결별해 해원이 더욱 자유로워지는 서두를 의미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 자신조차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해원의 갈대 같은 여심을 상징합니다.

부모가 결별 중인 상태에서 어머니마저 떠나 해원은 의지할 곳이 더욱 줄어들게 됩니다. 해원은 평소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으며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것은 물론 해원이 언니라 부르는 연주(예지원 분)의 집에서 묵으려는 것처럼 해원과 아버지와의 관계는 소원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래의 친한 동성 친구도 없으며 음주를 좋아하는 기분파인 해원은 ‘자유로운 영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로움을 심하게 타며 성준과의 불륜이 지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 주변의 평판에 마음을 쓴다는 점에서 인간의 모순성과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해원과 불륜 관계인 성준은 유부남이며 영화감독이고 영화과 강사라는 점에서 홍상수 감독 영화의 전형적인 ‘먹물’ 주인공입니다. 성준은 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왜 (당신도) 지식인이면서 지식인을 그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는가?’하는 질문을 받는다는 점에서 홍상수 감독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성준과 해원은 남한산성에서 데이트를 즐기다 수어장대에 올라 성준이 좋아한다는 음악을 함께 듣습니다. 놀랍게도 성준은 스마트폰이나 아이팟과 같은 휴대용 MP3 플레이어가 아니라 구시대의 유물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듭니다. 시대의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아날로그적 인물임이 드러납니다. 이어폰도 사용하지 않고 함께 음악을 듣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기괴해 웃음을 자아냅니다.

엔드 크레딧에도 제시되지 않는, 성준이 좋아하는 음악은 ‘더 폴 :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의 서두와 ‘킹스 스피치’의 클라이맥스 연설 장면에 활용되어 강렬했던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알레그레토를 편곡한 것입니다. 애당초 원곡은 힘이 넘치지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성준이 직접 편곡했다고 밝힌 곡은 카세트의 늘어진 듯한 상태와 카세트 플레이어의 지저분한 음질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느슨하며 우울한 곡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기괴함을 더합니다.

수어장대에서 해원과 성준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며 키스하는 장면의 롱 테이크가 마무리되는 순간 곡도 정확히 끝나 홍상수 감독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알레그레토는 수어장대의 카세트 플레이어 장면에 앞서 해원이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장면에서 피아노로 먼저 삽입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에서 합일되어 가장 로맨틱한 수어장대 장면 직후 해원이 다른 남자와 동침했다는 이유로 성준이 격분해 두 사람이 다투는 장면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사랑과 다툼을 반복하는 연인들의 습성을,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장면을 나란히 편집시켜 드러냅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알레그레토는 결말 직전의 남한산성 벤치 장면에서 다시 한 번 활용되는데 이번에는 음악이 끝난 뒤에도 성준과 해원이 함께 있는 장면이 잠시 지속됩니다. 어떻게든 관계를 끝내기 위한 두 사람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며 유부남과 미혼녀로서 7년 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연주와 중식(유준상 분)과 마찬가지로 해원과 성준의 불륜 관계 또한 지속될 것이라는 복선입니다. 성준이 해원을 부르는 애칭 ‘예쁜 새끼’를 중식이 연주에게 사용한다는 점 또한 동일한 의미의 복선입니다.

외로움을 심하게 타며 성준과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괴로움 또한 커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는 해원은 나름의 탈출구를 찾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연히 사직동 카페에서 만난 미국대학 교수(김의성 분)입니다.

그에 앞서 같은 장소에서 해원은 카페 손님(류덕환 분)에게 유혹을 받지만 흡연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거부합니다. 해원은 길거리에 불이 붙은 담배꽁초만 봐도 꼬박꼬박 밟을 정도로 담배를 싫어하지만 미국대학 교수가 흡연하며 카페 손님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유혹하는데도 이에 응합니다. 외모와 나이를 감안하면 카페 손님이 미국대학 교수에 비해 우월하지만 해원은 사회적 배경과 조건이 확실한 미국대학 교수에 끌립니다.

이혼남인 미국대학 교수는 우연한 첫 만남에서 해원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뻔뻔스레 밝힙니다. 미국대학 교수는 대통령 표창의 부상으로 받은 시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원에게 건네며 환심을 삽니다. 해원도 연주와 중식을 만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났다며 안정을 희구하는 충동적인 심리 상태를 드러냅니다. 남자는 유혹하고 여자는 못이기는 척 넘어가는 홍상수 영화 특유의 ‘수작질’이 두드러지는 장면입니다.

대통령 시계를 아무렇지도 않은 소품으로 규정한 것은 전작들에서 한국 정치에 대해 직접적인 시각을 드러내지 않아 상당히 비정치적이었던 홍상수 감독의 성향을 감안하면 매우 이채롭습니다. 한국 정치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비판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인 시각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준 또한 해원에게 ‘수작질’합니다. 해원과 빗속에서 만나자 ‘너랑 다 하겠다’며 섹스에 대한 열망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이 뜻하지 않게 영화과 학생들의 술자리에 합석하게 되어 성준의 성욕은 충족되지 못합니다. 참고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는 섹스에 대한 대화는 있으나 섹스 장면과 노출 장면은 없습니다.

영화의 서두와 결말은 모두 해원의 꿈과 내레이션으로 장식됩니다. 서두의 꿈속에서 해원은 샬롯 갱스부르의 어머니 제인 버킨과 만납니다. 해원은 샬롯 갱스부르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제인 버킨은 해원이 자신의 딸 샬롯 갱스부르와 닮았다고 합니다. 해원이 어머니를 만나기 직전에 꾸는 꿈으로 이상적인 모녀 관계에 대한 해원의 잠재의식을 드러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해원은 허구의 인물인데 반해 제인 버킨은 실존 인물로 등장해 기묘한 엇갈림과 긴장을 조성한다는 점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극중에서 제인 버킨의 딸이 누구인지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함을 발휘해 긴장을 배가시킵니다.

이자벨 위페르를 캐스팅했던 ‘다른 나라에서’에 이어 다시 한 번 세계적인 프랑스 여배우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여성 등장인물이 자신의 일기를 내레이션으로 제시하는 것 또한 ‘다른 나라에서’와 동일합니다. 서촌을 찾는 제인 버킨과의 대화 이후 ‘북촌은 사람이 많아서’라는 해원의 대사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을 연상시킵니다. 전작에 출연했던 국내 배우들을 비슷한 이미지로 재활용하는 방식 또한 여전합니다.

성준과 함께 하는 남한산성의 장면 직후 해원은 도서관의 낮잠에서 깨어납니다. 성준과의 관계가 모두 꿈이거나 아니면 일부가 꿈일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극중에서 해원의 잠은 깊은 잠이 아닌 잠시 엎드려 취하는 낮잠입니다. 장자의 호접지몽을 연상시킵니다. 인간의 삶은 한갓 낮잠처럼 찰나의 것에 불과하다는 주제의식입니다.

해원은 성준과의 대화에서 타인의 기억 속에 남지 않고 잊혀지고 싶다며 자유에 대한 열망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기억의 장소인 사직동과 남한산성에서 맴돌며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준에 대한 사랑의 기억 또한 잊지 못합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상대만 바꿔 동일한 대화를 나누는 등장인물들은 결코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해원과 어머니가 ‘무섭다’고 규정하는 사직동의 신사임당 동상, 해원과 영화과 학생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이후 유심히 카메라가 훑는 건국대학교 설립자 상허 유석창의 동상(건국대학교는 ‘옥희의 영화’에서도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거대한 기념물인 남한산성은 인간이 결코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웅변합니다.

인간에 대한 기억은 ‘뒷담화’를 만들어냅니다. 성준과 해원은 자신들의 사랑을 비밀로 하고 싶지만 스스로의 입으로 약속을 어기며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물론 타인에 대해서도 ‘뒷담화’를 나눕니다. 이국적인 정은채의 외모와 ‘초능력자’에서의 출연 경력을 살려 해원이 혼혈이 아닌가하는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지만 극중에서 진위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같은 과 학생들이 해원을 혼혈로 의심하는 것은 아무래도 해원의 자유분방한 태도가 일조했을 것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7명의 배우가 출연해 롱 테이크로 촬영된 영화과 술자리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비롯해 극히 일상적인 상황과 대화를 포착하지만 제3자인 관객의 입장에서는 기괴하며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홍상수 영화의 개성은 여전합니다. 카메라를 한 대만 활용해 롱 테이크와 갑작스런 줌으로 촬영되어 일반적인 영화들과도 차별화되기에 현실적이면서도 생뚱맞은 분위기는 가중됩니다.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홍상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맥락 없고 뜬금없으며 기괴한 것입니다. 홍상수 영화는 코미디로 분류될 수 있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모순적인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직시하는 것과 같은 등골이 서늘한 웃음을 제공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사랑 또한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 남자라는 이름의 수컷
극장전 - 영화를 위한 영화
옥희의 영화 - 독특한 형식미, 홍상수의 변주곡
북촌 방향 - 우연에 의존한 일상성의 고찰
다른 나라에서 - 끊임없이 반복, 변주되는 우주적 인연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까만별 2013/03/05 02:36 #

    잘 읽었습니다.^^
  • cobaltBlue 2013/03/05 10:52 # 삭제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영화 한편을 다 본 기분이군요.

    누구의 딸도 아닌 정은채를 보고 싶지만,,,,,,,,, 상영하는 극장수가 별로 없고 너무나 멀어 아무래도 극장에서 보기는
    힘들 듯 합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타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라 많이 좋아하는 편입니다.

    데이빗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같이 기억의 왜곡을 보는 느낌이라.......
    그 기괴함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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