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팅은 ‘데미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의사 출신으로 영국 정부 각료 스티븐(제레미 아이언스 분)은 아들 마틴(루퍼트 그레이브스 분)의 여자친구 안나(줄리엣 비노쉬 분)와 격정적인 섹스를 나눕니다. 스티븐은 안나와의 패륜 관계가 지속되는 것에 갈등하지만 좀처럼 포기하지 못합니다.
조세핀 하트의 소설을 루이 말 감독이 영화화한 1992년 작 ‘데미지’가 재개봉되었습니다. 1994년 코아아트홀 등에서 개봉되었을 당시 외설 논란으로 인해 삭제 및 모자이크로 만신창이가 된 채 공개된 바 있는데 무삭제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 재개봉된 것입니다.
사실 ‘데미지’의 러닝 타임에서 섹스 장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줄리엣 비노쉬의 헤어 누드나 제레미 아이언스의 성기 노출 장면도 있지만 매우 빠르게 지나가며 두 주인공의 섹스 장면 대부분이 옷을 입은 채 연출되었기에 20년이 지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노출의 강도가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데미지’가 개봉 당시 충격적인 반응을 몰고 온 것은 격정적인 육욕에 빠지는 두 주인공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될 사이 즉, 근친상간의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총리 후보로까지 하마평에 오르는 유능한 각료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 남자가 패륜에 빠져 자신과 가족을 파멸로 몰아가는 과정이 놀랍기에 ‘데미지’가 화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주인공은 처음 만난 이후 별달리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눈빛만으로 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짤막한 전화 한 통으로 스티븐은 안나의 집으로 달려가 첫 번째 섹스를 나누게 됩니다.
‘데미지’는 섹스 그 자체보다 패륜적 섹스를 앞두고 초조함에 시달리며 섹스 이후 맞이해야 하는 후회와 허무감, 그리고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행위로서의 섹스가 아닌 관계로서의 패륜에 방점을 두는 것입니다. 영화 속 가장 큰 사건인 패륜의 발각과 마틴의 죽음 이후에도 상당한 러닝 타임을 할애해 스캔들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가정이 파괴되고 각료직에서 사임해 떠돌이 신세가 되는 스티븐의 고통스러운 삶을 끝까지 포착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입니다.
늘씬하고 지적이며 우아한 완벽주의자 이미지의 제레미 아이언스가 패륜에 빠지기에 ‘데미지’는 관객의 몰입을 배가시킵니다. 그가 욕정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거나 섹스를 통해 욕정을 채우며 초점을 잃고 풀리는 눈빛 연기는 강렬합니다. 금지된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주인공으로서 제레미 아이언스의 이미지는 ‘M 버터플라이’와 ‘롤리타’에서도 계속됩니다.
스티븐의 파멸적 운명은 그의 첫 번째 등장 장면을 비롯해 여러 차례 삽입된 계단 장면을 통해 반복 암시됩니다. 스티븐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느와르 영화 등에서 종종 사용되는 ‘추락’을 상징하는 클리셰입니다. 안나와 마틴의 결혼 발표 이후 스티븐은 안나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지만 이내 안나에게 아파트 열쇠를 받고는 관계를 회복합니다. 안나와의 밀회를 위해 아파트 꼭대기 방까지 계단을 오르는 스티븐은 최악의 추락을 위해 최고의 상승을 준비하는 순간입니다. 스티븐은 지고의 쾌감과 두근거림을 느끼며 상승합니다.
스티븐과 안나의 비밀스런 섹스는 마틴에 의해 발각됩니다. 마틴은 추락사하며 스티븐은 알몸으로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스티븐이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은 지위, 명예, 가족, 사랑 등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다는 의미입니다. 며느리 감을 사랑하다 아들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는 스티븐의 패륜적 사랑과 그로 인한 비극은 현실적이며 직선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이며 상징적입니다.
비극을 암시하는 것은 계단뿐만이 아닙니다. 스티븐과 안나가 함께 할 때마다 흐르는 현악기 위주의 배경 음악은 호러 영화의 그것처럼 불길합니다. 마틴이 가족 모임에서 안나와의 결혼을 발표하는 순간 놀란 스티븐이 피처럼 선명한 레드 와인을 식탁에 뒤엎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유혈의 파국과 가족의 파괴를 암시합니다.
제목 ‘데미지(Damage)’는 안나의 대사 ‘상처 입은 사람은 위험하다(Damaged people are dangerous)’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안나는 10대 시절 자신을 여자로서 사랑했던 1살 터울의 친오빠가 자살해 정신적 상처를 입은 바 있습니다. ‘데미지’는 안나의 근친상간의 과거를 상징함과 동시에 안나와 스티븐이 근친상간으로 인해 치유가 불가능할 또 다른 상처를 입게 됨을 암시하는 중의적인 제목입니다.
1990년대 초반 전성기를 구가하던 줄리엣 비노쉬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우며 음울한 여성 안나로 출연합니다. 검정색 단발머리의 안나는 검정색 옷을 즐겨 입는데 오빠의 죽음과 동시에 마틴의 죽음을 암시하는 상복과도 같습니다.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가 마틴을 결혼상대로 결정한 이유도 죽은 오빠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어린 시절의 근친상간에서 헤어나지 못해 또 다른 근친상간에 휘말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미지’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추악한 패륜을 다루지만 고급스런 이미지의 두 주연 배우의 열연을 통해 결코 추악하지만은 않게 묘사됩니다. 배우로서 연기하기 까다로운 카메라 가운데에 배치되어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장면이 적지 않지만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흥미로운 조연은 안나의 어머니 엘리자베스(레슬리 카론 분)입니다. 4번이나 결혼한 여성으로 안나가 기질적으로 어머니를 닮았음을 암시합니다. 상견례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올리는 주책 맞은 인물이지만 스티븐과 안나의 관계를 단번에 눈치 채는 본능적으로 예리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안나의 주변을 계속 맴돌다 그녀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피터 역의 피터 스토메어는 최근 ‘라스트 스탠드’에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굿바이 칠드런 - 친구와 함께 하고 사라져간 유년기
http://twitter.com/tominodijeh

조세핀 하트의 소설을 루이 말 감독이 영화화한 1992년 작 ‘데미지’가 재개봉되었습니다. 1994년 코아아트홀 등에서 개봉되었을 당시 외설 논란으로 인해 삭제 및 모자이크로 만신창이가 된 채 공개된 바 있는데 무삭제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 재개봉된 것입니다.
사실 ‘데미지’의 러닝 타임에서 섹스 장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줄리엣 비노쉬의 헤어 누드나 제레미 아이언스의 성기 노출 장면도 있지만 매우 빠르게 지나가며 두 주인공의 섹스 장면 대부분이 옷을 입은 채 연출되었기에 20년이 지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노출의 강도가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데미지’가 개봉 당시 충격적인 반응을 몰고 온 것은 격정적인 육욕에 빠지는 두 주인공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될 사이 즉, 근친상간의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총리 후보로까지 하마평에 오르는 유능한 각료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 남자가 패륜에 빠져 자신과 가족을 파멸로 몰아가는 과정이 놀랍기에 ‘데미지’가 화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주인공은 처음 만난 이후 별달리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눈빛만으로 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짤막한 전화 한 통으로 스티븐은 안나의 집으로 달려가 첫 번째 섹스를 나누게 됩니다.
‘데미지’는 섹스 그 자체보다 패륜적 섹스를 앞두고 초조함에 시달리며 섹스 이후 맞이해야 하는 후회와 허무감, 그리고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행위로서의 섹스가 아닌 관계로서의 패륜에 방점을 두는 것입니다. 영화 속 가장 큰 사건인 패륜의 발각과 마틴의 죽음 이후에도 상당한 러닝 타임을 할애해 스캔들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가정이 파괴되고 각료직에서 사임해 떠돌이 신세가 되는 스티븐의 고통스러운 삶을 끝까지 포착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입니다.
늘씬하고 지적이며 우아한 완벽주의자 이미지의 제레미 아이언스가 패륜에 빠지기에 ‘데미지’는 관객의 몰입을 배가시킵니다. 그가 욕정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거나 섹스를 통해 욕정을 채우며 초점을 잃고 풀리는 눈빛 연기는 강렬합니다. 금지된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주인공으로서 제레미 아이언스의 이미지는 ‘M 버터플라이’와 ‘롤리타’에서도 계속됩니다.
스티븐의 파멸적 운명은 그의 첫 번째 등장 장면을 비롯해 여러 차례 삽입된 계단 장면을 통해 반복 암시됩니다. 스티븐이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느와르 영화 등에서 종종 사용되는 ‘추락’을 상징하는 클리셰입니다. 안나와 마틴의 결혼 발표 이후 스티븐은 안나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지만 이내 안나에게 아파트 열쇠를 받고는 관계를 회복합니다. 안나와의 밀회를 위해 아파트 꼭대기 방까지 계단을 오르는 스티븐은 최악의 추락을 위해 최고의 상승을 준비하는 순간입니다. 스티븐은 지고의 쾌감과 두근거림을 느끼며 상승합니다.
스티븐과 안나의 비밀스런 섹스는 마틴에 의해 발각됩니다. 마틴은 추락사하며 스티븐은 알몸으로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스티븐이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것은 지위, 명예, 가족, 사랑 등 모든 것을 잃고 추락한다는 의미입니다. 며느리 감을 사랑하다 아들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는 스티븐의 패륜적 사랑과 그로 인한 비극은 현실적이며 직선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이며 상징적입니다.
비극을 암시하는 것은 계단뿐만이 아닙니다. 스티븐과 안나가 함께 할 때마다 흐르는 현악기 위주의 배경 음악은 호러 영화의 그것처럼 불길합니다. 마틴이 가족 모임에서 안나와의 결혼을 발표하는 순간 놀란 스티븐이 피처럼 선명한 레드 와인을 식탁에 뒤엎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유혈의 파국과 가족의 파괴를 암시합니다.
제목 ‘데미지(Damage)’는 안나의 대사 ‘상처 입은 사람은 위험하다(Damaged people are dangerous)’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안나는 10대 시절 자신을 여자로서 사랑했던 1살 터울의 친오빠가 자살해 정신적 상처를 입은 바 있습니다. ‘데미지’는 안나의 근친상간의 과거를 상징함과 동시에 안나와 스티븐이 근친상간으로 인해 치유가 불가능할 또 다른 상처를 입게 됨을 암시하는 중의적인 제목입니다.
1990년대 초반 전성기를 구가하던 줄리엣 비노쉬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우며 음울한 여성 안나로 출연합니다. 검정색 단발머리의 안나는 검정색 옷을 즐겨 입는데 오빠의 죽음과 동시에 마틴의 죽음을 암시하는 상복과도 같습니다.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가 마틴을 결혼상대로 결정한 이유도 죽은 오빠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어린 시절의 근친상간에서 헤어나지 못해 또 다른 근친상간에 휘말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미지’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추악한 패륜을 다루지만 고급스런 이미지의 두 주연 배우의 열연을 통해 결코 추악하지만은 않게 묘사됩니다. 배우로서 연기하기 까다로운 카메라 가운데에 배치되어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장면이 적지 않지만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흥미로운 조연은 안나의 어머니 엘리자베스(레슬리 카론 분)입니다. 4번이나 결혼한 여성으로 안나가 기질적으로 어머니를 닮았음을 암시합니다. 상견례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올리는 주책 맞은 인물이지만 스티븐과 안나의 관계를 단번에 눈치 채는 본능적으로 예리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안나의 주변을 계속 맴돌다 그녀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피터 역의 피터 스토메어는 최근 ‘라스트 스탠드’에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굿바이 칠드런 - 친구와 함께 하고 사라져간 유년기
http://twitter.com/tominodijeh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