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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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 자막 오역, ‘오겡끼데스까’? 영화

※ 본 포스팅은 ‘러브 레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1995년 작 일본 영화 ‘러브 레터’는 1999년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1998년 정부의 일본대중문화개방으로 인해 뒤늦게 정식 개봉되어 사전에 불법 복제물을 통해 ‘볼 사람은 다 봤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1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예상외의 흥행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영화를 상징하는 명대사로 ‘잘 지내시나요?’를 의미하는 ‘오겡끼데스까(お元気ですか)는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러브 레터’를 통해 한국의 관객들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역사적 이유로 인해 멀게 만 느껴졌던 일본인과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인과 한국 대중문화와 비교해 정서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말입니다. ‘왜색’이라는 선입견을 바탕으로 본능적 거부감을 지녔던 일본의 대중문화에도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어 마음을 울리는 훌륭한 작품이 존재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발견한 것입니다. ‘러브 레터’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큰 거부감 없이 자연스레 한국에 스며들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13년 밸런타인데이를 맞이해 ‘러브 레터’가 재개봉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블루레이 발매를 앞두고 HD 리마스터링 소스가 공개된 것입니다. 애당초 이와이 슌지 감독이 소위 ‘뽀샤시’한 영상을 선호했기에 HD 리마스터링의 효과는 칼 같은 해상도를 자랑하는 최근 영화에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러브 레터’가 지닌 특유의 매력만큼은 여전합니다. 스릴러를 방불케 하는 꼼꼼하고 치밀한 각본과 홋카이도 오타루의 설경이 대변하는 아름다운 영상이 이와이 슌지의 탄탄한 연출력에 힘입어 어우러집니다. 한 여자는 사무쳤던 사랑과 이별하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며 다른 여자는 모르고 지나쳤던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안타까워합니다.

결말에 등장해 지나쳤던 사랑을 확인하는 소품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권인 7권이 활용되는 것은 의도적입니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분)가 전학 간 동명의 중학 동창생 후지이 이츠키(카와시바라 타카시 분)의 사랑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때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중학생 시절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이츠키와 함께 맡게 된 도서관 일이 이츠키의 직업이 된 것도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흥미롭게도 영화에 등장하는 두 남자의 개성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이츠키는 과묵하며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결혼 프로포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등산 중 조난당해 죽는 순간까지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를 부르는 매우 엉뚱한 인물입니다. 반면 이츠키의 선배이자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분)의 새로운 연인이 되는 아키바(토요카와 에츠시 분)는 여유가 넘치며 배려를 아끼지 않는 상식적인 인물입니다. 이츠키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중학생 시절처럼 소년과 같았지만 아키바는 나이에 걸맞은 성숙한 남성인 것입니다. 히로코가 이츠키에서 출발해 아키바에 도착하는 과정은 미성년에서 성인으로 성숙해지는 성장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극중에 활용된 아날로그적인 소품 또한 인상적입니다. 이츠키는 PC보다는 아날로그의 느낌이 강한 워드프로세서로 편지를 쓰며(1인 2역을 맡은 나카야마 미호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필적을 ‘연기’하기는 어려웠기에 활용된 고육지책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제는 단종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학교 구석구석을 촬영하는 장면은 ‘러브 레터’가 추억에 관한 영화임을 분명히 합니다. 괘종시계나 자전거와 같은 소품 역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아날로그적입니다.

하지만 재개봉된 ‘러브 레터’의 한글 자막은 감동을 반감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우선 오프닝 크레딧의 ‘토요키와 에츠시’와 본편 중 2번이나 반복되는 ‘국토’는 각각 ‘토요카와 에츠시’와 ‘국도’의 명백한 오타입니다.

무엇보다 1999년 개봉 당시 결말의 마지막 대사의 한글 자막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 하겠습니다’는 이번 재개봉에도 변함없이 재활용되었는데 명백한 오역입니다. 원 대사는 ‘やっぱりてれくさくてこの手紙は出せません’으로 직역하면 ‘역시 멋쩍어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 하겠습니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멋쩍다’, ‘겸연쩍다’는 의미를 지닌 ‘てれくさい’를 ‘가슴이 아프다’로 멋대로 의역한 당시의 한글 자막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입니다. 수입사 측에서는 비용 절감을 노린 것인지 아니면 관객에게 억지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14년 전의 오역 자막을 재활용한 것인지 의도를 알 수 없으나 연출자의 의도를 거스르는 오역 자막은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재개봉 관람에 앞서 오역 자막만큼은 ‘겡끼(元気)’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최근 들어 유독 삭제되거나 엉망으로 번역된 한글 자막을 앞세운 영화들이 줄을 이어 개봉하는지 어처구니없기만 합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맞춰 개봉을 앞두고 있는 외화 중에는 벌써부터 삭제 논란이 불거지는 영화도 있습니다. 한국의 관객들, 즉 소비자들은 정당한 관람료, 즉 비용을 지불하고도 훼손된 문화 상품 구입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영화 수입사들의 기본적인 마인드가 여전히 후진적이라면 정식으로 비용을 지불하고자 하는 소비자들마저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두 - 자유와 속박 사이에서 헤매는 사랑
러브 레터 - 떠나보내는 사랑, 깨달았지만 올 수 없는 사랑
피크닉 - 원죄 의식과 자유에 관한 여행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 이와이 슌지의 자본주의 비판 동화
4월 이야기 -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소년이 성장하기까지
하나와 앨리스 - 사랑과 우정 사이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costzero 2013/02/19 19:56 #

    본의아니게 오뎅의 매출을 늘렸던 음식영화로 착각하게한...
    항상 일본의 영화는 어느정도 선에서 절제를 하니 재미가 떨어집니다.
    히로인의 절규나 영혼의 삿대질같은게 나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분노를 해도 절제하는...
    문제는 상대에게도 자신과 동일한 수준을 원하니 슬픔.
  • 양쓰 2013/02/20 15:20 #

    겸연쩍다를 가슴이 아프다로 의역한쪽이 저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두 인물이 서로에게 공감과 애정을 형성했기도 했구요.
    그 사실을 알리는것이 상대방에게 도리어 예가 아닐것같고 미안하고 그런 감정이 들었을태니까요.
    쑥쓰럽다-멋쩍다-겸연쩍다 작은 차이지만 늬앙스가 많이 변하지요.
    번역이란 참 어려운 일이네요..
  • 나녹 2013/02/21 13:26 #

    140만명 동원이란 성적도 있으니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하고 예전 자막을 그대로 쓴 건 아닐까요; 블루레이판엔 오타가 없었으면 좋겠네요.

    ‘てれくさい’에 대해서는 한국인 정서에 맞는 번역을 한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일본인은 저 다섯 자 너머의 속마음까지 헤아리며 깊은 여운을 얻겠지만 직접화법을 좋아하는 한국의 관객에겐 오히려 너무 싱거울 수 있을 거 같아요. 해금되고 수입된 첫 영화인만큼 배급사도 대중성을 원했을 것이고.
  • 아키 2013/03/22 20:19 # 삭제

    예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그런 글을 본적이 있어요.

    "'가슴이 아파서'는 명백한 오역이다... 그치만 이례적으로 용서하고 싶은 오역이다. 2년동안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의 연인 이츠키는 죽는 순간까지도 첫사랑 이츠키를 그리워하지 않았나? 잃어버린 첫사랑의 추억을 찾은 이츠키(여성)에 비하면 히로코는 비참하다. '가슴이 아파서'는 그나마 그 둘 (히로코와 여성 이츠키)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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