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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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 섬세하며 압도적인 심리 묘사

부유한 가문의 차남으로 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30세의 독신남 다이스케는 친구 히라오카와 아내 미치요 부부를 돕다 미치요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다이스케는 정략결혼을 독촉하는 가문과 미치요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1909년 작 ‘그 후’는 소재를 규정하면 ‘불륜’이지만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며 특별히 자극적인 사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소설로 연재되어 대중들을 사로잡은 작품인 만큼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힘이 있습니다. 꽃과 향기에 집착하는 다이스케의 취향을 반영하듯 색채와 후각에 대한 탐미적 묘사는 물론 압도적인 심리 묘사가 두드러집니다.

외형적으로는 3인칭 시점이지만 다이스케의 내면 외에 다른 인물의 심리는 알 수 없으며 철저히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사건도 전개되기에 1인칭 시점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름의 논리와 원칙에 충실한 다이스케의 심리가 심층적으로 묘사되어 독자는 줄거리가 단순하며 서사에 여백이 많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 후’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매우 입체적인 인물인 다이스케의 괴리입니다. 다이스케는 노동을 혐오하며 가문에서 받는 돈으로 생활은 물론 독서와 음악 감상 등 취미 생활을 즐기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형이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하는 데에는 거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소중한 취미 생활이 부정한 돈으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려는 태도가 경제 능력이 없는 다이스케의 정체성에 엄청난 괴리감을 형성합니다. 괴리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을 통해 경제 능력을 확보하고 가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합니다.

다이스케는 철저히 관념적이며 우유부단한 인간이기에 행동을 위한 결단에 주저합니다. 평소 우유부단하며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지 않던 다이스케가 모처럼 자신의 주장을 앞세워 결단을 내린 것이 파멸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컬합니다. 다이스케는 결단을 내린 뒤 결말에서야 구직을 위해 외출하지만 이미 그의 내면은 파괴된 상태이며 주변 상황 또한 돌이키기에 늦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내면에 괴리와 모순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다이스케의 괴리와 그 원인이 되는 우유부단에 대해 공을 들여 섬세하면서도 분석적으로 묘사했기에 설득력을 갖춰 흡인력이 뛰어납니다.

‘그 후’는 다이스케의 시점으로 전개되기에 미치요와의 사랑이 나름대로 정당성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히라오카가 병약한 미치요에 소홀하며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다이스케가 부부 사이를 갈라놓고 가정을 파괴할 권리는 없습니다. 미치요를 사랑하면서도 3년 전 히라오카와 결혼하도록 주선한 것부터 다이스케는 위선적인 행동을 선택한 것이며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쿄로 돌아온 히라오카 부부를 상대로 한 최선의 선택은 두 부부와 더 이상은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지만 다이스케의 우유부단함과 결단은 최악으로 귀결됩니다. 친구 히라오카와의 절교와 경제적으로 뒷받침했던 가문과의 인연도 끊기게 된 것입니다. 사회적 지탄 또한 다이스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작품 초반 다이스케와 서생 가도노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의 첫 대면에서 다이스케는 무엇이든 얼버무리는 가도노의 태도를 속으로 경멸하는데 실은 그 같은 가도노의 태도가 아버지, 형, 형수를 대할 때 항상 어물쩍 넘어가는 다이스케의 태도와 놀랄 만치 닮았다는 점에서 전율을 자아냅니다. 즉 다이스케는 자신이 혐오하며 열등하다고 규정하는 인물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초반부터 드러난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이며 정상적인 인물은 형수 우메코입니다. 다이스케의 형 세이고와 사랑은 없는 듯하지만 두 자식을 아끼며 시아버지와 시동생에게도 충실한 사려 깊은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부유한 가문의 며느리로서 현실성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와 형이 인연과 경제적 지원을 끊는다 해도 우메코는 남몰래 다이스케의 생활비를 대며 계속 돕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후’의 또 다른 매력은 급속히 근대화, 도시화, 서구화, 산업화된 20세기 초반 일본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점입니다. 다이스케는 홍차와 빵을 비롯한 양식을 즐기며 외국의 소설을 원서로 구해 탐독합니다. 피아노도 연주할 줄 압니다. 우메코는 프랑스에서 옷감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도쿄 시내에는 전차가 다니며 기차도 등장합니다. 다이스케의 친구 중에는 전문 번역가도 존재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근대화, 서구화된 일본 사회이지만 미치요는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미치요 본인의 선택보다는 히라오카와 다이스케의 담판에 의해 결정되며 주고받는 물건처럼 묘사됩니다. 여성의 권리는 무시당한 채 봉건적이며 후진적인 관습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다이스케의 아버지 나가이 도쿠가 어린 시절 살벌한 사무라이의 규범에 의해 좌우된 삶을 살아온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20세기 초반 일본은 전근대와 현대가 병존했으며 심각한 괴리에 노출된 사회였던 것입니다. 다이스케의 내면과 당시 일본 사회는 메우기 힘든 괴리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 같은 괴리를 대외 침략과 군국주의라는 야만적인 방식을 통해 해결을 도모하게 됩니다. 다이스케는 ‘야만의 시대’는 갔다고 규정하지만 진정한 야만의 시대는 나쓰메 소세키가 사망한 1918년 이후 본격화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식민지화한 것부터 야만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이스케는 근대화라는 가면을 쓰고 또 다른 야만을 획책하던 일본 사회의 괴리에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는 요절한 마쓰다 유사쿠의 주연작으로 1985년 영화화되었습니다. 2009년 9월 서울아트시네마의 ‘80년대 일본 뉴웨이브 특별전’을 통해 원제 ‘소레카라(それから)’로 공개된 바 있습니다. 영화는 원작의 줄거리와 탐미적 색채를 무난하게 옮겨오기는 했지만 다이스케의 복잡한 내적 갈등을 묘사하는 섬세함은 부족한 감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영상이 활자의 힘을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레카라 - 유복한 도련님의 파멸적 사랑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waterlily 2013/01/27 20:30 #

    좋은 책 소개 잘 보았습니다. 다음 주말에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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