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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 인간 통찰 돋보이는 19세기 막장 드라마

※ 본 포스팅은 ‘카라마조프 카의 형제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흡인력 뛰어난 막장 드라마

도스토예프스키의 최후의 걸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19세기 러시아의 소도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피해자의 장남이 용의자로 몰려 재판이 전개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장편 소설입니다.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도 전체 4부 12편으로 구성된 소설의 분량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극중에서 전개된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얼마나 꼼꼼하게 집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곳곳에 삽입된 액자식 과거 회상이나 등장인물이 창작한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 소설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공간적 배경이 된 소도시의 이름은 스코토프리고니예프스크 즉 ‘가축 시장’입니다. 극중에서 전지적 화자가 직접 개입해 머뭇거리면서 단 한 번만 도시의 이름과 그 의미를 밝혀 독자의 관심을 더욱 유발하는데 이름 그대로 동물적이며 본능적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로 가득합니다. 사랑, 정욕, 질투, 치정, 돈, 환락, 종교, 구원, 음모, 배신, 광기, 살인, 죽음 등 21세기 한국의 안방을 점령한 TV의 막장 드라마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소재들입니다. 그만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흡인력이 뛰어난 현대적인 작품입니다.

소설의 가장 큰 축을 형성하는 갈등은 치정입니다. 삼부자가 두 여자를 놓고 연적이 됩니다. 아버지 표도르와 장남 드미트리가 그루셴카를 놓고 대립하며 차남 이반이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체리나를 사랑하면서 복잡한 치정 관계가 성립됩니다. 후반부에는 삼남 알렉세이가 사랑하는 리자에 이반이 접근하면서 사부자가 세 여자를 놓고 갈등을 벌이는 형국까지 치닫습니다.

땀내 나는 뚜렷한 개성의 남자들

엄청난 분량의 소설을 이끌어가는 남성 등장인물들은 각기 개성이 매우 뚜렷합니다. 아버지 표도르는 세 명의 여자에게 네 명의 자식을 낳았을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결혼을 통해 졸부의 지위에 오른 이기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방탕한 생활이 부메랑이 되어 아들에게 존속 살해 당합니다. 살인자로 용의 선상에 거론되는 이들도 모두 아들들입니다. 표도르는 자신의 업보를 비싸게 치른 것입니다.

표도르는 위악적인 어릿광대로 웃음을 자아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물이나 사안의 본질에 본능적으로 접근하는 동물적 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결코 어리석은 인물은 아닙니다. 교양이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한 의도적인 허세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의외로 다양한 고전들을 주워섬깁니다. 표도르뿐만 아니라 드미트리 등 다른 인물들도 다양한 고전들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프랑스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이며 19세기 당시 프랑스 문화가 러시아를 지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남 드미트리는 외형적으로는 아버지 표도르처럼 방탕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진실하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다릅니다. 드미트리는 다소 변덕스럽지만 가장 열렬한 사랑에 불타오르는 남자이기도 합니다. 외면의 방탕함과 내면의 진실함의 충돌로 인해 드미트리는 광기에 시달립니다. 신학생 알렉세이와 조시마 장로를 제외하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남성 등장인물들에게는 대부분 수컷의 땀 냄새가 물신 풍기는데 드미트리는 그 땀내가 가장 진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양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드미트리가 툭하면 입에 올리는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는 실소를 자아냅니다.

드미트리와 어머니가 다른 이반은 여러모로 드미트리와 대조적입니다. 드미트리와는 정반대로 외형적으로는 금욕주의자이며 현학적인 지식인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위악적이며 잔혹한 사상적 배경을 지닌 인물입니다. 공고해 보이는 지식 또한 내실 없는 신기루였음이 드러납니다. 극중에서 ‘표도르와 닮은 것은 이반’이라는 검사 키릴로비치의 지적은 정확합니다. 하지만 이반 역시 외면과 내면의 불일치로 인해 갈등과 고뇌에 휘말리다 드미트리보다 더욱 심한 광기에 휘말립니다. 이반은 표도르가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면서도 막상 표도르가 살해되자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고뇌하다 섬망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반이 섬망증으로 인해 악마와 대면해 논쟁하는 부분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의 분열 및 초자아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파이트 클럽’, ‘메멘토’ 등의 영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현대적이며 세련되어 경탄을 자아냅니다. 알렉세이와 조시마 장로가 대변하듯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신의 창조와 종말에 기초한 러시아 정교, 즉 기독교 사상의 영향 하에 있는 작품이지만 악마는 윤회를 암시하며 순환론적 세계관, 즉 불교적이며 동양적인 관점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표드르가 업보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반의 악마적 성향을 육화한 인물이 바로 스메르쟈코프입니다. 표도르의 사생아이기도 한 스메르쟈코프는 타인에게 감사할 줄 모르며 치밀한 계획 하에 드미트리에 누명을 씌운 살인 행각에 대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사악한 인물입니다. 스메르쟈코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은 이반입니다. 이반이 정신, 즉 사상에만 함몰되어 행위로 옮기지 못한 소심한 인물이라면 스메르쟈코프는 사상을 직접 육체적 행위로 옮긴 대담한 인물이기에 두 사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드미트리, 이반, 스메르쟈코프 모두 광기에 휘말려 아버지 표도르의 살해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리게 됩니다.

삼남 알렉세이는 신학생이며 조시마 장로의 애제자인 만큼 성스러운 인물로 광기에 휘말리는 표도르의 나머지 세 아들과 달리 차분함과 고요함을 상징합니다. 이상주의자이면서도 이해심을 갖춰 포용력이 두드러집니다. 알렉세이가 소년들과 맞이하는 대단원은 교조적인 감이 없지 않으나 장편소설의 결말로서는 완벽에 가까우며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알렉세이와 소년들이 추도식에서 음식에 대해 긍정하는 것은 얼룩진 과거 세대의 인물들을 넘어 알렉세이와 소년들과 같은 신세대에게 ‘살아라’는 주제의식을 도스토예프스키가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알렉세이는 조시마 장로의 명에 따라 성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속으로 돌아갑니다. 리자에 대한 사랑은 성스럽다기보다 평범한 남자의 것으로 알렉세이 역시 교회가 아닌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보다 오래 생존했다면 알렉세이가 혁명가가 되는 속편이 집필되었을 텐데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속편이 집필되었다면 알렉세이가 성인(成人)이 되며 인간적인 측면이 보다 부각되었을 것이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대하소설의 반열에 올랐을 것입니다.

알렉세이와 대조되는 인물은 이반이나 스메르자코프가 아니라 라키친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알렉세이의 동료 신학생이기도 한 라키친은 친척인 카체리나의 돈을 뜯어 기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거짓된 기사를 작성하는 역겨운 출세주의자입니다. 이반이나 스메르자코프는 그릇된 방식이지만 개인의 안위보다는 거대한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나름의 내실을 갖추려 노력한 인물들이나 라키친은 타인에 대해 쉽게 험담하며 경박하고 이기적인 인물입니다. 만일 속편이 집필되었다면 라키친은 두드러지는 악역으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소설의 배경은 19세기이지만 라키친은 21세기의 인물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현대적입니다.

방탕한 표도르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금욕적인 조시마 장로는 가장 성스러운 인물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지녔습니다. 그가 드미트리를 만나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은 차후 닥칠 수난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조시마 장로의 사망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그의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는지 여부에만 집착하는데 이는 후반부에 드미트리의 재판을 흥밋거리이자 오락거리로 대하는 표피적인 자세의 청중들과 진실을 외면한 채 편의주의적 판결을 내린 배심원들과 상통합니다. 19세기에 이미 대중은 센세이셔널리즘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한편 조시마 장로의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난 것은 결코 그의 성스러움을 좀먹지 않으며 성스러움 또한 인간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는 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시마 장로가 성스러운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젊은 시절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표도르가 조시마 장로를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친척 미우소프가 중반 이후에는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뻔뻔스런 표도르와 달리 타인을 의식하는 보편적인 귀족에 가까운 미우소프는 조시마 장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표도르의 대척점에 해당되는 인물입니다. 초반에 상당한 비중이 할애되며 표도르를 매우 혐오하는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표도르의 살해 혐의에 대한 드미트리의 재판이 진행될 때 방청을 위해 등장했을 법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은 너무나 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도스토예프스키가 미우소프의 존재를 망각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질투심 심한 여성들

개성이 뚜렷한 남성들에 비해 여성 등장인물들의 개성은 상대적으로 변별력이 떨어집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카체리나와 그루셴카는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제외하면 질투심에 사로잡힌 젊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그루셴카에 비하면 이중인격에 가까운 변덕스런 카체리나가 보다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두드러집니다.

카체리나와 그루셴카에 비해 비중은 적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리자의 어머니이자 과부인 호흘라코바입니다.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는 주책바가지이며 젊은 남자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지랖도 넓어 외동딸의 사생활을 끊임없이 감시합니다. 급전 3000루블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 드미트리를 상대로 호흘라코바가 뻔히 알면서도 딴청을 피우는 부분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작품 전체에서 가장 큰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천박한 호흘라코바와 달리 비중이 많지 않은 딸 리자가 그나마 긍정적인 여성 등장인물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대부분의 여성 등장인물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나 상대적으로 평면적으로 다룬 것은 그 자신이 남성이기 때문에 비롯된 한계로 보이기도 합니다. 남녀평등 사상이 일반화되기 이전의 후진적인 러시아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 또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헤치다

남녀 간의 차이보다는 귀족과 평민의 계급 차이에서 비롯된 경제적 격차 및 사회적 격차가 보다 두드러집니다. 평민의 비극적 삶은 드미트리에 모욕을 당한 스네기료프와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은 일류샤 부자의 집안의 처참한 가난을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조시마와 표도르의 죽음을 통해 선과 악, 성과 속이 뚜렷이 대조된다면 무고한 일류샤와 살인을 저지른 스메르쟈코프의 이른 죽음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뚜렷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드미트리의 재판이 단 1심으로 종결되는 것 또한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후진적입니다. 자유자재로 시점을 바꾸며 종종 자신을 드러내는 전지적 화자는 드미트리의 재판에 참석했음을 분명히 합니다.

긴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엄청난 흡인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해 실소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카체리나가 연적 그루셴카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카체리나의 표변하는 얄팍한 심리가 여지없이 드러나 웃음을 자아냅니다. 격정적이며 성말라 번번이 바닥을 드러내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인의 특성인 것처럼 언급하지만 한국인의 국민성과도 비슷해 감정을 이입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전 세계적인 고전으로서 시공을 넘어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헤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실내 장면이 많고 장면 별로 호흡이 길어 연극적인 작품이지만 표도르를 살해한 진범을 추적하는 과정에서는 촘촘한 암시들을 곳곳에 뿌려 추리소설과 같은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등장인물들 간의 삐걱거리는 갈등이 묘사되고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 다음 진범을 찾아내는 과정과 재판이 병행되는 것은 전형적인 추리 소설의 전개 방식이기도 합니다.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된 3권 분량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가독성이 뛰어난 번역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당초 러시아인들도 읽기 어렵다는 도스토예스프키의 소설이지만 한국의 독자들을 배려한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책의 두께가 상당하지만 지질이 좋고 가볍습니다. 어디에든 휴대해 종이 냄새를 맡으며 읽어야만 역시 고전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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