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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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 양자역학 주제의 난해한 SF

오스트레일리아인 작가 그렉 이건의 1992년 작 ‘쿼런틴’은 서기 2034년 태양계가 거대한 버블에 휩싸여 외우주로부터 ‘격리(Quarantine)’된 뒤 서기 2066년 사립탐정 닉이 거동이 불가능한 여성 로라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며 발생하는 일대 사건을 묘사하는 SF입니다.

‘쿼런틴’의 주인공 닉은 전직 경찰 출신의 사립탐정입니다. 닉이 죽은 아내의 환영에 시달리는 외로운 장년 남성이며 냉소적이고 집요하면서도 윤리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설정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에서 따온 것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 역시 동일한 맥락입니다. 잠입 조사 과정에서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는 것 또한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의 전형적인 전개입니다. 하지만 정신을 되찾은 이후 자신이 조사하던 의문의 조직에 의해 스카우트되어 충성을 다하게 되는 반전은 독특합니다.

하드 SF ‘쿼런틴’은 중반 이후 양자역학을 소재가 아닌 주제로 삼기에 번역자 김상훈이 해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특별한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지는 않습니다. 즉 일반인과는 거리가 먼 양자역학에 대한 상당한 배경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면 ‘쿼런틴’의 후반부 전개와 결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렉 이건은 적당한 선에서 대중성을 확보하며 타협하기보다 극한까지 자신의 상상력을 확장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 전체를 반복해 읽어도 제대로 된 이해는 쉽지 않지만 곳곳에서 인상적인 요소들을 찾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무수한 가능성이 상존하는 패럴럴 월드와 타임머신의 시간 여행을 연상시키는 전개나 유색 인종인 주인공이 약물을 복용해 소변으로 짙은 피부를 배출시키고 백인으로 변화하는 부분은 인상적입니다.

중국과 한국이 경제 강국으로 등장하는 등 아시아 국가의 힘이 강하다는 설정은 기존의 영미 SF에서 자주 보던 설정입니다. 여주인공인 포콰이를 비롯해 동양인이 다수 등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사 종교의 폐해를 비판하는 초반부는 1995년 일본에서 발생한 옴 진리교 사건을 예견한 듯하며 결말에서 개별 인간들의 육체가 융합되며 절멸하는 전개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The End of Evangelion’의 인류보완계획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쿼런틴’의 등장인물 중에는 ‘은하영웅전설’의 오마주가 분명한 양 웬리도 등장하며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도시 ‘뉴 홍콩’의 명칭은 ‘기동전사 Z건담’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SF가 국내에 소개되는 일이 드물었다는 점, 그리고 1992년 최초로 출판되어 나름대로 신작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쿼런틴’의 국내 번역본은 의미가 있지만 절판되어 구하기 쉽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잠본이 2012/11/11 13:18 #

    인류보완계획에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되는 텍스트는 꽤 여러 가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각각 과정이나 원리는 다르지만 모두 인류의 절멸과 통합을 통한 신세계 탄생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제작진이 뭐라고 밝혔는지는 알 수 없어서 직접적인 연관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는 짐작만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만...
    http://en.wikipedia.org/wiki/Childhood's_End
    아서 클라크 '유년기의 끝'(1946년 단편 '수호천사'로 시작하여 1952년에 장편으로 확장) - 외계인의 개입과 에너지체로의 진화
    http://en.wikipedia.org/wiki/Blood_Music_(novel)
    그렉 베어 '블러드뮤직'(1983년 동명 단편으로 시작하여 1985년에 장편으로 확장) - 나노기술과 바이오테크놀로지의 오용으로 인한 세포변이
    http://homepage3.nifty.com/hirorin/chocoparfait.htm
    야마모토 히로시 '슈뢰딩거의 초콜릿 파르페'(1985년 동인지에 발표하여 2005년 개작) - 양자역학과 꿈 에너지의 결합으로 인한 세계 개조(+덕후 사소설)

    쿼런틴의 경우는 신비주의나 주인공의 사적인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일편단심 양자역학!'으로 전개하고 있는 게 다른 점이죠. 위의 3작품에 비해 무지하게 읽기 어렵다는 것도 그렇고 OTL
  • kidsmoke 2012/11/11 13:50 #

    머리는 아프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얘기하신 피부색 바꾸는 장면 말고도 경탄하게 만드는 과학적 묘사가 돋보이는 부분이 참 많았어요. 절판되기 전에 사서 다행이네요 ㅋㅋ
  • 함월 2012/11/11 15:26 #

    서양 SF 소설에 동양인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건 처음 봐서 깜짝 놀랐었지요. 무엇보다 지구가 '격리'된 이유가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확실히 딱딱하기 그지 없는 소설이긴한데... SF를 전혀 모르는 사람 중에도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 사람이 없진 않더군요.

    - 주인공이 원래 유색인종인건 아니고, 이 때의 호주인들은 자외선에서 보호받기 위해 인위적으로 피부에 멜라닌 색소를 주입하는데, 주인공도 그 시술을 받았던걸로 기억합니다.
    - 소설 속의 중국은 폐쇄적인 통치로 인해 망해가는 독재국가로 나오죠. 소설에 등장하는 중국 첩보원들을 보면, 작가가 예전에 실제 있었던 호주 총리 실종사건에 중국이 연루되어 있다는 음모론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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