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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 무모하며 불합리한 중세인의 사랑과 전쟁

장 마르칼이 쓰고 김정란이 번역한 ‘아발론 연대기’는 8권에 걸쳐 마법사 멀린의 탄생과 우터의 즉위와 사망, 그리고 우터의 아들인 아더 왕의 즉위와 치세, 몰락을 묘사합니다.

권위적인 학계에 불만을 품고 대학교수직을 사직한 탁월한 이야기꾼 장 마르칼은 아더 왕에 관한 무수한 유럽의 신화들을 그러모아 짜깁기하면서도 통일된 구성을 확립했으며 쉽고 간결한 문체로 현대 독자들을 배려합니다. 본문에는 저자의 주와 역주는 물론 삽화까지 삽입되었으며 각 권 말미에는 멀린과 모르간과 같은 마법사를 등장시키는 등 클리프 행어와 같은 암시로 후속권에 대한 흥미를 유발합니다. 끝으로 ‘저자의 말’을 통해 중세 신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서양인의 사고방식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아발론 연대기’의 서사의 가장 큰 축은 외형적으로는 성배 찾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더 왕의 아내인 귀네비어 왕비와 최고의 기사 란슬롯의 불륜입니다. 장 마르칼은 귀네비어는 왕권을 상징하는 태양신과 같은 존재라고 거듭 주지시키며 현대적 윤리의 잣대로 두 사람의 관계를 재단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귀네비어와 란슬롯은 자신들의 ‘궁정식 사랑’ 즉, 불륜에 대한 죄의식이 매우 희박합니다.

두 사람의 불륜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듯한 아더는 불륜 사실을 알아차린 원탁의 기사들의 참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란슬롯과 전쟁을 벌이지만 란슬롯은 왕에게 죄를 짓지 않았으며 결백하다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귀부인, 즉 유부녀에 대한 사랑을 숭고한 사랑으로 예찬하는 중세의 기사도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귀네비어와 란슬롯의 불륜은 뻔뻔스런 부도덕에 불과하며 현대 독자의 감정 이입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아더, 란슬롯, 갈라하드, 모드레드 등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정상적인 결혼이나 양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또한 중세적입니다. 출생과 성장 과정 역시 신화적인 것입니다. 난교를 의미하는 ‘넓적다리 우정’이나 불륜을 의미하는 ‘궁정식 사랑’, 그리고 란슬롯과 게일호트의 사이에서 암시되는 동성애 등 틀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제시됩니다. 아더와 귀네비어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으며 잠시 등장하는 아더의 아들 로호트는 어이없는 죽음을 위해 제시되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더와 귀네비어는 두 사람 사이에서 후사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소원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덜컥 들어주겠다고 호언하는 기사들의 태도 또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이 같은 호언장담으로 인해 기사들은 뒷수습을 하지 못해 쩔쩔매며 때로는 어이없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끼니조차 잇지 못하고 이슬을 맞으며 돌을 베개 삼아 숲에서 노숙하면서도 명예와 사랑을 위해 위험천만한 편력 여행에 나서는 것 또한 무모합니다.

무모하며 불합리한 기사도의 정점은 성배 찾기입니다. 모든 악을 정화시키는 성배이지만 성배를 찾아 이득을 본 것은 아더 왕이 아니라 어부왕입니다. 오히려 아더는 성배 찾기 과정에서 동료 간의 우발적인 충돌(목소리를 듣고도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무작정 결투를 벌인 끝에 동료 기사를 살해하는 것 역시 ‘중세적’입니다.)로 인해 원탁의 기사들이 희생되며 ‘선한 기사’ 갈라하드와 퍼시발 또한 사라집니다. 보호트만이 성배 찾기를 마무리하고 돌아오지만 성배를 비롯해 그가 아더 왕에게 가져온 전리품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무용담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의심을 품으면 보호트가 진정 성배를 찾은 것인 지도 의문입니다.

성배 찾기가 종료된 후 원탁의 기사들은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 내분을 일으켜 왕국의 붕괴와 종말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무의미한 맥거핀에 불과했던 성배에 집착한 원탁의 기사들의 태도에서 중세인의 달뜬 종교적 열망이 십자군 원정이라는 그릇된 행동으로 귀결된 역사적 대사건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의 모든 예언은 이루어진다는 점 역시 현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아발론 연대기’를 대변하는 중세적 정서인 무모함과 불합리함이 현대와 무관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현대인들은 성배 찾기와 같은 무모한 꿈을 꾸며 불합리한 불륜에 빠집니다. 불륜은 애절한 사랑의 고통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성을 강조한 근대 서양인에 비해 감정과 쾌락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더욱 중세인에 가까워졌는지도 모릅니다. ‘아발론 연대기’의 무모함과 불합리함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경과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등장인물의 나이와 그에 따른 용모의 변화를 묘사하는데 인색하기에 ‘아발론 연대기’는 신화적입니다. 각 권의 내용은 분절적이어서 파편적이기까지 하지만 차곡차곡 치밀하게 쌓인 갈등 구조는 최종권인 8권 ‘아더 왕의 죽음’에 이르러 대폭발하며 전형적인 영웅 서사다운 비장하고도 허망한 결말에 도달합니다. 비슷한 모험담이 반복되어 지루한 감이 드는 중반부의 전개를 인내하면 8권에서는 엄청난 속도감과 몰입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사도와 기독교적 윤리, 그리고 켈트적 자유분방함과 미개한 원시적 사고가 뒤섞인 ‘아발론 연대기’의 또 다른 매력은 등장인물들의 강렬한 개성입니다. 주인공 아더 왕은 엑스칼리버를 뽑고 즉위한 이후에는 존재감이 희미해집니다. 왕은 조정자의 역할에 국한되기를 강요받기 때문입니다. 장 마르칼이 지적하듯이 아더 왕은 체스판의 왕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8권에서 란슬롯을 응징하려 모처럼 나서지만 오히려 자신의 죽음과 왕국의 멸망을 자초합니다.

귀네비어 왕비는 끝 모를 미모를 지닌 여성으로 아더, 란슬롯, 모드레드 등 뭇 남성들을 매혹시키는데 그녀에 대한 기사들의 집착은 단순히 미모에 대한 집착보다는 그녀를 손에 넣어야만 왕국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상징으로 보입니다.

귀네비어에 대한 증오와 호수의 부인 비비안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가득한 아더 왕의 누이 모르간은 기사들의 편력을 방해하는 악녀로 묘사되지만 죽음을 맞은 아더 왕을 자신이 통치하는 아발론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한 악녀로 치부하기 어렵습니다. 란슬롯을 비롯한 기사들을 편력 여행 도중 자극하며 시련에 빠뜨리는 것 역시 기사들을 더욱 단련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듯합니다. 따라서 모르간은 선과 악 양면을 지닌 여성 등장인물 중 가장 입체적입니다. 귀네비어와 란슬롯과 같은 위선적인 인물에 비해서는 훨씬 솔직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서민 출신의 퍼시발은 기사로 인정받기까지 바보스러운 인물로 묘사되지만 권력 다툼이나 허울 좋은 기사도로부터 자유로운 평민 출신이기에 왕국의 붕괴와 기사들의 몰살로부터 면제되는 혜택을 누립니다. 중세적 권위나 봉건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퍼시발이야말로 현대적이며 현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란슬롯의 아들 갈라하드는 성배 찾기를 완결시키는 ‘선한 기사’로 여성에도 무관심한 완벽한 기사이지만 그는 성배 찾기가 완수된 직후 죽음을 맞기에 작위적이며 도구적 인물이라는 혐의를 벗지 못합니다.

장대한 영웅 서사시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에 ‘아발론 연대기’는 ‘삼국지’를 연상시키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온화하며 덕 있는 군주로 묘사되는 아더는 유비와, 뛰어난 무예만큼이나 강한 자존심을 지닌 란슬롯은 관우와, 경박한 성격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케이는 장비와, 아더 왕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지닌 가웨인은 조운과 닮은 점이 언뜻 엿보이며, 무한한 지력을 지녔으나 전쟁의 살육에 회의를 느낀 추한 외모의 멀린은 제갈량과 방통을 혼합한 듯합니다. 무모한 원정과 참혹한 패전으로 인해 부하들을 잃고 왕국의 쇠망을 촉진한 아더 왕의 아르모리크 브르타뉴 원정은 유비의 이릉 전투와 닮았습니다.

오늘의 책 지름 - ‘아발론 연대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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