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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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관람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영화

※ 본 포스팅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같이 난해한 스릴러는 감독이 관객보다 주도권을 쥐기 마련입니다. 등장인물이 다수이며 많은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 가운데 결말에 가서야 영국정보부 ‘서커스’의 소련 내통자 ‘두더지’의 정체가 밝혀지는 만큼 관객은 철저히 감독이 원하는 대로 서사의 어두컴컴한 미로를 더듬다 극장 문을 나서게 됩니다. 따라서 첫 번째 관람 시 남은 강한 잔상의 실체를 확인하며 관객이 감독과 동등하거나 혹은 우월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재관람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관람에서 무엇보다 초점을 맞춘 것은 빌(콜린 퍼스 분)이 소련과 내통하는 ‘두더지’가 된 이유였습니다. 범인의 ‘범행 동기’에 해당하는 암시는 대사를 통해 두 차례 언급됩니다. ‘서커스’의 수장 콘트롤(존 허트 분)은 부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더지’의 전향 동기에 대해 ‘쫓고 쫓기는 판국에 이유가 대수인가’라고 언급합니다. 전향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는 감독의 연출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결말에서 스마일리(게리 올드만 분)가 정체를 밝혀낸 뒤 전향 이유를 묻자 빌은 ‘유럽은 썩었다’고 언급합니다. 서방 자본주의의 타락에 대한 빌의 실망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추상적이며 모호한 대사임에는 분명합니다.

결국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범인의 범행 동기보다는 범인 색출이 더욱 중요한 스릴러인 셈입니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와 더불어 정치적인 이유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첩보 스릴러의 이중첩자의 전향 이유가 불분명한 것은 아쉽습니다. 처음 관람하며 ‘킹스 스피치’로 작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콜린 퍼스가 비중이 적은 조연급으로 캐스팅될 배우는 아니기에 영화 중반까지 의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가 바로 스마일리의 아내를 유혹한 ‘두더지’였습니다.

빌과 절친한 짐(마크 스트롱 분)도 매우 인상적인 인물입니다. 짐은 부다페스트 작전 투입에 앞서 빌이 ‘두더지’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사전에 정보를 빌에게 제공합니다. 작전 실패로 임무 중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짐은 소련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전향해 영국으로 돌아와 교사로 근무하다 빌의 정체가 노출되자 KGB의 지령을 받고 살해합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두더지’와 관련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지만 짐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절친한 동료까지 살해해야 하는 극적인 인물은 없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교사로 일하던 짐이 유일하게 교감하게 되는 제자는 외톨이 소년 빌 로치(윌리엄 해독 분)입니다. 영국 정보부 소속이었지만 신분 노출로 조직에서 퇴출되었으며 소련의 첩자가 되어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처지가 빌과 같기에 동병상련을 강하게 느낍니다. 짐이 소년 빌에 호의적인 또 다른 이유는 ‘서커스’에서 절친했던 동료 빌과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정체가 탄로 난 빌을 제거하는 비정한 임무가 짐에게 부여된 것은 잔혹한 역설입니다. 빌은 짐의 저격을 왼쪽 눈 아래에 맞고 살해되는데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연출되었습니다. 빌의 피눈물은 동료를 살해하는 짐의 눈물과 대칭을 이룹니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경쾌한 곡 ‘La Mer’가 깔리는 가운데 맞이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결말은 짐과 빌의 입장에서는 새드 엔딩이지만 스마일리로서는 공사를 통틀어 다섯 가지의 측면에서 해피 엔딩입니다. 첫째, 자신이 맡은 지난한 사건을 해결해 임무를 완수했으며 둘째, 타의에 의해 해직된 ‘서커스’에 복직되었으며 셋째, ‘서커스’의 수장에 올라섰으며, 넷째,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연적 빌이 응징되었으며 다섯째, 아내를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스마일리의 해피 엔딩은 ‘La Mer’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박수갈채로 뒷받침됩니다.

재관람을 통해 첫 번째 관람에서는 무심코 놓친 촘촘한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콘트롤의 후임으로 ‘서커스’의 수장이 된 퍼시(토비 존스 분)가 독자적으로 미국에 줄을 대고 있다거나 피터(베네딕트 컴버배치 분)가 동성 애인과 동거 중이었음 드러내는 장면 등은 짤막하게 삽입되었는데 두 번째 관람 시 보다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위치크래프트 작전’을 둘러싼 ‘서커스’ 내부의 암투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작사가 ‘Karla Films’인 것은 극중에서 ‘두더지’를 통해 ‘서커스’를 농락한 KGB의 칼라(Karla)와 무관하지 않은 장난기 어린 작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오락 영화가 대세인 최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며 끼워 맞출 수도 있도록 절제의 미학이 돋보이는 ‘팅커 테일로 솔저 스파이’를 앞으로도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도록 국내에 제대로 된 한글자막을 갖춘 블루레이가 정식 발매되기를 기대합니다.

렛 미 인 - 외로운 소년 소녀의 붉은 핏빛 사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묵직한 아날로그 첩보 스릴러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미사 2012/02/15 10:59 #

    오, 짐과 빌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꼭 원작과 같으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원작에서 짐과 빌은 우정 이상의 관계였고, 짐이 빌을 살해한 것은 다분히 개인적인 동기였죠. 그런데 영화에서 주어진 정보로만 본다면, 디제님의 해석도 납득이 갑니다^^
  • umma55 2012/02/15 11:54 #

    번역이 좀 아쉽죠.
  • deepthroat 2012/02/15 13:21 #

    보다가 나갔다는 사람이 많다는데서 놀랬습니다; 전 일요일 저녁에 봤는데도 나간 사람을 못 봤는데(나갔는데 영화에 빠져서 못 봤을지도;)
    간만에 침이 마르는 영화였습니당...
  • 잠본이 2012/02/15 21:38 #

    그런데 영화만 봐서는 짐이 총쏘는 게 누군가의 지령 때문이라는 것 못 느끼겠던데 제가 놓친 뭔가라도 있는지요?
    제 눈에는 아무리 봐도 개인적인 애증에 따른 치정살인으로 보여서(...)

    카를라 필름즈는 진짜 웃겼죠. 으하하하 이놈들이 이런데서 장난을 치다니
  • 디제 2012/02/15 21:47 #

    물론 제가 틀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짐이 헝가리에서 소련으로 끌려간 뒤 고문 끝에 전향하고 영국에 돌아와 '서커스'에서 떠난 듯이 거짓 행동하다

    이용가치가 소멸한 빌의 살해 지령을 KGB로부터 받고 갈등 끝에 (외톨이 소년과의 관계도 신경질적으로 청산하죠.) 저격, 살해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잠보니님 말씀대로 개인적인 애증이 원인이라면 짐은 빌이 '두더지'라는 사실에 실망해서 저격한 것이 되는 것인지요?

    짐은 이미 헝가리로 향하기 전부터 빌이 '두더지'임을 직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짐의 정체가 모두에게 탄로 난 뒤에 굳이 살해할 필요는 없었을 듯합니다만...
  • 잠본이 2012/02/15 22:03 #

    제 생각에도 빌이 '두더지'라는 사실 자체에 짐이 실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빌 때문에 동유럽에서 그 개고생을 겪었고 또 한편으론 (실제는 어떤지 모르지만 추측하건대) 빌 덕분에 그나마 목숨은 건졌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수도 있는 형편이라 원망과 애착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것 같더라고요. 빌과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뗄래야 뗄 수 없는(inseparable) 단짝이었던 인물이었던 만큼 그 감정이 꽤 깊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왕따 소년(역시 이름이 빌)과 헤어지는 것도 빌과의 과거를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싶고요.

    물론 디제님 말씀대로 지령이 있었다고 해도 앞뒤는 들어맞도록 잘 연출되어 있죠. 저는 혹시나 제가 놓친 다른 단서가 있는지 궁금해서 여쭤보았을 따름입니다. 원작은 어떤지 나중에 한번 읽어볼 예정입니다. =]
  • ㅇㅇ 2012/02/17 20:05 # 삭제

    '개인적인 애증에 따른 치정'이 맞습니다. 짐 프리도와 빌 헤이든 둘은 서로 연인관계였죠. 그러니까 사랑하던 사람이 자기를 장기말처럼 내다버린 거에 대한 실망이랄까요.
  • ㅇㅇ 2012/02/17 20:09 # 삭제

    그리고 그 동기는 '추상적이고 모호한'게 맞다고 봐요. 그들이 서커스에 들어갈 때만 해도 대영제국을 위해, 나치를 몰아내기 위해 싸운다는 어떤 대의가 있었지만
    냉전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내가 옳은 것도 니가 옳은 것도 아니고....
    그런 표지판이 사라진 혼란에 더해 내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다룬다는 지식인다운 허영, (아무래도 가까이서 보니 더 잘 보일) 조국의 허위의식에 대한 환멸,
    뭐 그런 게 뒤섞인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원작을 읽은 게 좀 돼서 생각이 안 나는데 잡힌 이후의 빌의 대사도 그런 식이었던 거 같아요.
  • 광팬 2012/02/18 15:32 # 삭제

    원작을 봐야알겠지만.. 짐을 살린 것은 빌 아니었을까요? 살아와서 자금도 전달받고... 빌은 짐을 친구이상으로 사랑해서 살려주었고 짐은 동료를 배신한 빌을 사랑하지만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각되어지더군요.
  • 히히 2012/02/18 20:59 # 삭제

    헛.. 저만 본건가요...? 포인트에서 조금 벗어난 이야기긴 하지만 마지막에 조지와 빌이 이야기를 나눌때 부탁할게 있느냐고 묻는 씬이 있는데 그때 빌이 조지에게 말하죠. 집정리를 부탁한다고 그리고 집에 어린여자아이를 부탁한다고요. 자기가 떠난 이유를 스파이짓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잘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사랑한다고도 말하죠. 그리고 또한 남자아이도 있다고... 그에게도 그렇게 말해달라고요... 그걸 보고 느낀건데 빌은 짐과도 사랑하는 사이였고, 또 여자랑도 남자랑도 사랑하는 양성애자 였더군요. 물론 앤은 사랑없이 칼라에 의한 지령에 따른 거구요.

    그리고 짐이 조지를 죽인건 애증이 맞다고 생각되구요. 스파이 인건 눈치 채고 있었지만 사랑하기에 소련으로 되돌려지면 겪을 고통을 줄여주고자 쏜것처럼 느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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