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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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 빠른 전개 강점인 데이빗 핀처의 ‘007’ 영화

※ 본 포스팅은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지 ‘밀레니엄’의 기자로 재벌의 비리를 파헤치다 소송에 패한 기자 미카엘은 방예르 그룹의 총수 헨리크(크리스토퍼 플러머 분)로부터 40년 전 살해된 여조카 하리에트의 살해범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여성 해커 리스베트(루니 마라 분)가 참여하면서 조사는 활기를 띱니다.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을 영화화한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 ‘밀레니엄’)은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답게 오프닝 크레딧부터 영화 중후반까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무장한 편집이 돋보입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단 1초도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으며 압도적인 양의 대사와 무수한 컷을 삽입해 마구 휘몰아칩니다.

한 소녀의 살인 사건 조사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난해한 연쇄 살인 사건이 소재가 된다는 점에서 ‘밀레니엄’은 데이빗 핀처의 전작인 ‘세븐’과 ‘조디악’을 연상시킵니다. 잔혹한 장면을 전시하는 손쉬운 방법보다 심리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재기 넘치는 스릴러라는 점에서 ‘밀레니엄’은 ‘세븐’과 ‘조디악’과 닮았습니다.

하지만 ‘밀레니엄’은 ‘세븐’처럼 종교적, 철학적인 작품도, ‘조디악’처럼 사회적인 작품도 아닙니다. 단지 재벌 가문의 유전적이며 개인적인 광기에 초점을 맞추는 주제의 측면에서는 가벼운 오락 영화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지막 살인이 완성된 ‘세븐’이나 진범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조디악’에 비해 이해하기 쉬운 스릴러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스릴러’라는 의미는 바꾸어 말하면 범인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짐작이 충분한 가능한 범인이 밝혀진 뒤에는 오히려 전개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는 것이 ‘밀레니엄’의 약점입니다. 하리에트의 행방뿐만 아니라 두 주인공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행보까지 모두 설명하려다보니 씁쓸한 여운을 남기려는 감독의 의도는 도리어 사족이 되었습니다. 후반 이후까지 속도감을 잃지 않았다면 157분의 부담스런 러닝 타임은 5분 정도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프닝 크레딧부터 시작해 엔드 크레딧까지 사용된 음악은 데이빗 핀처의 영화들이 그랬듯이 적재적소에서 분위기를 고양시키는데 기여하지만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사용된 에냐의 ‘오리노코 플로’는 기괴함을 자아내려는 의도로 활용된 듯하나 오히려 뜬금없어 실소를 자아내 긴장감을 떨어뜨립니다.

‘밀레니엄’은 단순히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히는 데만 집중하지 않고 대조적 성격의 두 주인공 미카엘과 리스베트에도 상당한 비중을 할애합니다. 두 주인공은 작품 속에서 조우하기까지 러닝 타임의 절반을 기다려야 합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에게서 ‘007’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한데 강렬한 오프닝 크레딧이나 ‘나도 옛날에는 오토바이를 탔다’고 언급하는 대사, 그리고 위험을 즐기는 집요한 성격, 바람둥이 기질 모두 ‘007’을 떠올리게 합니다.

데이빗 핀처의 전작 ‘소셜 네트워크’에서 주커버그의 여자 친구 에리카 역을 맡았던 루니 마라가 분한 리스베트는 본드 걸입니다. 중년의 미카엘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조사한다면 신세대인 리스베트는 해킹을 활용해 업무를 분담합니다. ‘007’에서 본드 걸이 007에 의해 목숨을 건지는 것과 달리 산전수전 다 겪은 리스베트는 오히려 완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미카엘을 구원합니다. 007과 본드 걸,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역전된 것입니다. 여성 상위로 시작되는 첫 번째 섹스 장면과 여성 상위로 마무리되는 두 번째 섹스가 암시하듯 리스베트는 매우 남성적이며 공격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스베트와 법적 후견인 닐스(요릭 반 와게닝엔 분)의 관계 역시 섹스 체위로 암시됩니다. 닐스는 금전적으로 어려운 리스베트에게 섹스를 강요하는데 리스베트를 침대에 묶어놓고 후배위로 성폭행하는 것은 남성성이 강한 리스베트의 자존심을 더욱 짓밟는 행동입니다. 성폭행만으로도 충분히 치욕스럽지만 여성적이며 수동적인 체위를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냉정을 잃지 않는 리스베트가 비명을 지르며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뒤에서 하는 게 좋아?’라고 리스베트에 묻는 닐스의 대사는 후배위를 더욱 강조합니다. 리스베트는 닐스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없는 남근을 큼지막한 금속 모형으로 대신해 강탈당한 남성성을 되찾습니다.

담배 역시 등장인물 간의 관계 변화를 상징합니다.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아 리스베트에게 실외에서 흡연하라고 하던 미카엘은 리스베트와의 첫 섹스 이후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합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건이 해결된 뒤 미카엘은 담배를 끊었다고 리스베트에게 언급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식었음을 암시하며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입증됩니다. 미카엘과 가까워지며 리스베트의 스모키 화장이 점차 옅어지며 사랑을 확신한 시점에는 피어싱과 화장을 지우고 매우 여성적인 금발로 분장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에이리언3 - 에이리언보다 무서운 죽음의 자본
세븐 - 음울한 도시가 진범(眞犯)인 걸작 스릴러
파이트 클럽 -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다
조디악 -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소셜 네트워크 - 최연소 억만장자의 역설적 인간관계

http://twitter.com/tominodijeh


덧글

  • 블랙 2012/01/19 10:04 #

    ‘뒤에서 하는 게 좋아?'라고 한 대사는 점잖게(?) 바꾼거고 원래는 '애널 섹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지?' 입니다.
  • 지나가는이 2013/01/04 06:57 # 삭제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도움되는 감상평이라 생각되구요.
    그리고 사족을 달고 싶어서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네요 :)

    할리우드판의 미카엘과 007의 이미지의 본드가 굳이 연관성이 있다고는 보는 것은, 조금 멀리 간게 아닌가 합니다. 포스팅에는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요, 제 생각에는 히어로가 부각되는 할리우드판 영화들의 특색이 007과 밀레니엄1부에서 드러나게 되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도 skyfall을 본지 몇달 안되서 그런지, 느낌상으론 비슷하게 감정이입이 되긴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원작의 분위기나 작가의 진지함에 충실했던 스웨덴판이 느낌상으론 더 좋았던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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