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드라이브’는 정체불명의 무적과 같은 사나이가 홀연히 이웃을 돕는 ‘셰인’과 같은 할리우드 서부극의 전형적 서사를 범죄가 횡행하는 오늘날 LA의 밤거리로 옮겨왔습니다. 무고한 유부녀와 그의 어린 아들, 그리고 무기력한 ‘똘마니’ 가장이라는 취약하기 짝이 없는 가족을 위해 잃을 것 없는 고독한 정의의 주인공이 갱들을 상대로 처절한 사투를 펼칩니다. 주인공이 집착하는 자동차는 서부극의 조연 백마로 치환될 수 있으며 결말 또한 전형적입니다. 깔끔한 단편 소설처럼 보이는 ‘드라이브’의 서사는 실은 영웅 판타지입니다.
서사만 놓고 보면 참신한 면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드라이브’는 독특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우선 도시의 익명성을 강조하는 이름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는 주인공이 매력적입니다. (그의 중반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아이린의 남편 스탠다드의 이름에 관한 농담도 등장합니다.) 과거를 알 수 없으며 과묵해 자신의 능력을 알리는데 입에 의존하지 않아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자기 과시적이며 뻔뻔스러운 것과는 대조됩니다.
대사가 적은 대신 표정 연기와 슬로 모션, 그리고 음악을 통해 주인공의 감정을 관객에 전달하는 세련된 방식을 선택합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 역시 감정을 절제하는 주인공처럼 조용합니다. 최종 보스 버니(알버트 브룩스 분)와의 전화 통화에서 늘 입는 점퍼에 자수로 새겨진 전갈에 자신을 비유하듯, 주인공은 사막의 전갈처럼 고독하면서도 매서운 존재입니다.
작품 제목과 직결되는 오프닝의 자동차 추격전 장면은 자동차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으로 주로 제시되어 사실성과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오락 영화의 일반적인 추격전 장면이 자동차 바깥의 전지적 시점으로 주로 구성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많은 컷과 재빠른 편집에 의존하지 않아 1980년대의 우직한 아날로그 액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나른한 음악 역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대사가 적은 주인공과 독특한 시점의 초반 자동차 추격 장면과 달리 고어 장면은 돌발적이며 유혈의 수준이 상당합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조용한 만큼 고어 장면은 보다 강렬하며 폭발력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짧게 스쳐 가는 고어 장면을 전후로 삽입된 슬로 모션과 처음에는 하얗던 점퍼가 피칠갑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인상적입니다.
몇몇 장면의 미장센도 흥미롭습니다. 아이린과 대화하는 주인공이, 스탠다드와 베니치오의 사진이 걸린 거울에 비치는 것은 주인공의 딜레마를 직접적으로 상징합니다. 출소한 스탠다드가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역시 스탠다드를 연적으로 의식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반영한 것입니다. ‘드라이브’는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데뷔작은 아니지만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이나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엘 마리아치’와 같은 데뷔작을 보았을 때와 같은 새로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분해 섬세하게 연기하는 라이언 고슬링 못지않게 캐리 멀리건과 알버트 브룩스, 그리고 니노 역의 론 펄만 등 조연들도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아이린과의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모든 감정을 털어놓는 신파조의 대사는 없는 편이 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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