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팅은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뱃사람이었던 죽은 아버지를 기리며 매일 같이 코쿠리코 언덕에서 바다를 향해 깃발을 내걸던 고교 1학년 여학생 우미는 학교 신문에 자신을 소재로 시를 쓴 1년 선배 슌에 관심을 가집니다. 철거 직전의 동아리 건물 ‘카르티에 라탱’에서 슌과 가까워진 우미는 자신과 슌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사야마 테츠노리 원작, 다카하시 치즈루 작화의 만화를 스튜디오 지브리가 애니메이션화한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남 미야자키 고로의 두 번째 연출작입니다. 데뷔작이었던 판타지 ‘게드 전기’의 평이 좋지 않았던 만큼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현실을 배경으로 지브리의 전형적 요소들을 적극 활용합니다.
예의바르고 활달하며 요리를 비롯한 가사에도 능한 독립적인 성격의 소녀가 여주인공으로 설정되어 고난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것은 그야말로 ‘지브리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녀가 늠름한 소년과 만나 풋풋한 첫사랑에 빠져들며 성장한다는 서사 역시 지브리의 전형적인 것입니다. 배와 바다, 대가족과 할머니, 아이들을 이해하는 관대한 어른, 코믹한 조연들의 군상 활극의 요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반 뜻밖의 반전으로 슌과 우미가 배다른 남매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며 슌은 ‘막장 드라마 같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91분의 짧은 러닝 타임이 말해주듯 두 사람의 관계를 막장 드라마처럼 질질 끌지는 않습니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 기본적으로 어린이들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가족 영화이기 때문이지만 슌과 우미가 자신들이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매우 직선적으로 반응해 평소 속내를 감추는 것이 남을 배려하는 것이라 믿는 일본인이 맞는 것일지 의문일 정도로 시원시원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속도감을 유지하는 미덕을 발휘합니다.
카르티에 라탱의 철거를 막기 위해 도쿄에 다녀온 두 사람이 헤어지기 직전 전차 정거장 앞에서 손을 잡는 장면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스킨십은 항구에서 배에 올라타기 직전 슌이 우미를 껴안다시피 하는 것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함과 동시에 사랑이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숨김없이 확인하며 전진하는 소년, 소녀의 모습은 ‘귀를 기울이면’이나 ‘벼랑 위의 포뇨’와 같은 상쾌함과 청량감으로 가득합니다.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카르티에 라탱의 철거를 막기 위해 두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합니다. 이는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된 1963년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코앞에 둔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출발점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슌과 우미를 비롯한 동아리 소속 학생들이 카르티에 라탱의 철거에 반대해 옛것과 너무나 손쉽게 결별하는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며 단체 행동에 돌입한 것은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의고적인 주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1960년에 데뷔한 가수 후나키 카즈오와 전차, 그리고 곤로에 성냥불을 붙여 밥을 짓는 모습 등은 쇼와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활력 넘치는 반세기 전을 배경으로 직선적인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도전 의식을 상실한 21세기 디지털 세대에 대한 고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야자키 고로가 두 번째 연출작마저 실패했다면 지브리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70세 노령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 자리 잡는 것은 완전히 물 건너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배경으로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소위 ‘안전빵’이라 할 수 있는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비교적 무난한 결과물로 남을 듯합니다. ‘게드 전기’에서 각본까지 맡았다 실패했던 미야자키 고로가 ‘코쿠리코 언덕에서’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각본의 힘을 빌렸는데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추후 과연 각본과 연출 모두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http://twitter.com/tominodijeh

사야마 테츠노리 원작, 다카하시 치즈루 작화의 만화를 스튜디오 지브리가 애니메이션화한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남 미야자키 고로의 두 번째 연출작입니다. 데뷔작이었던 판타지 ‘게드 전기’의 평이 좋지 않았던 만큼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현실을 배경으로 지브리의 전형적 요소들을 적극 활용합니다.
예의바르고 활달하며 요리를 비롯한 가사에도 능한 독립적인 성격의 소녀가 여주인공으로 설정되어 고난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것은 그야말로 ‘지브리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녀가 늠름한 소년과 만나 풋풋한 첫사랑에 빠져들며 성장한다는 서사 역시 지브리의 전형적인 것입니다. 배와 바다, 대가족과 할머니, 아이들을 이해하는 관대한 어른, 코믹한 조연들의 군상 활극의 요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반 뜻밖의 반전으로 슌과 우미가 배다른 남매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며 슌은 ‘막장 드라마 같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91분의 짧은 러닝 타임이 말해주듯 두 사람의 관계를 막장 드라마처럼 질질 끌지는 않습니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 기본적으로 어린이들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가족 영화이기 때문이지만 슌과 우미가 자신들이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매우 직선적으로 반응해 평소 속내를 감추는 것이 남을 배려하는 것이라 믿는 일본인이 맞는 것일지 의문일 정도로 시원시원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속도감을 유지하는 미덕을 발휘합니다.
카르티에 라탱의 철거를 막기 위해 도쿄에 다녀온 두 사람이 헤어지기 직전 전차 정거장 앞에서 손을 잡는 장면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스킨십은 항구에서 배에 올라타기 직전 슌이 우미를 껴안다시피 하는 것으로 발전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함과 동시에 사랑이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숨김없이 확인하며 전진하는 소년, 소녀의 모습은 ‘귀를 기울이면’이나 ‘벼랑 위의 포뇨’와 같은 상쾌함과 청량감으로 가득합니다.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카르티에 라탱의 철거를 막기 위해 두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합니다. 이는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시간적 배경으로 설정된 1963년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코앞에 둔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출발점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슌과 우미를 비롯한 동아리 소속 학생들이 카르티에 라탱의 철거에 반대해 옛것과 너무나 손쉽게 결별하는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며 단체 행동에 돌입한 것은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의고적인 주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1960년에 데뷔한 가수 후나키 카즈오와 전차, 그리고 곤로에 성냥불을 붙여 밥을 짓는 모습 등은 쇼와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활력 넘치는 반세기 전을 배경으로 직선적인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도전 의식을 상실한 21세기 디지털 세대에 대한 고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야자키 고로가 두 번째 연출작마저 실패했다면 지브리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70세 노령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로 자리 잡는 것은 완전히 물 건너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배경으로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소위 ‘안전빵’이라 할 수 있는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비교적 무난한 결과물로 남을 듯합니다. ‘게드 전기’에서 각본까지 맡았다 실패했던 미야자키 고로가 ‘코쿠리코 언덕에서’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각본의 힘을 빌렸는데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힘을 빌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추후 과연 각본과 연출 모두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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