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 앨든 로빈슨 감독의 1992년 작 ‘스니커즈’는 만능 암호 해독기를 매개로 한 스릴러의 얼개를 갖춘 코미디입니다. 역시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아 1975년에 개봉된 숨 막히는 스릴러 ‘코드네임 콘돌’을 연상할 수 있지만 ‘스니커즈’는 스릴러보다는 코미디의 요소를 강조합니다. 애당초 우아한 미남의 이미지가 강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초로인 50대 중반에 접어들어 출연한 영화라 자극적인 면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최근 스릴러가 화끈한 액션이나 강렬한 고어를 수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스니커즈’는 좋게 말하면 부드럽고 나쁘게 말하면 밋밋합니다. 서사는 헐겁고 대사는 유치하며 전반적인 분위기는 말랑말랑한데 스릴러와 코미디라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장르를 결합시키려 한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개봉 당시에는 첨단 기술을 앞세웠지만 20여 년이 지나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현 시점에서는 ‘스니커즈’가 앞세운 첨단 기술은 낙후된 과거의 산물일 뿐입니다. 꽉 짜여진 각본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채 첨단 기술만을 강조한 영화는 오래 기억되기 어렵다는 평범한 교훈을 ‘스니커즈’는 재확인합니다. 서사를 좌우하는 만능 암호 해독기의 현실성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스니커즈’의 암호 해독기 탈환 장면은 1996년 작 ‘미션 임파서블’에, 화려한 캐스팅의 코믹 스릴러라는 점에서는 2001년 작 ‘오션스 일레븐’에 영향을 준 것처럼 보입니다. 마틴의 가장 젊은 동료 칼로 등장한 리버 피닉스는 ‘스니커즈’가 개봉된 이듬해에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목소리로 유명한 제임스 얼 존스가 역시 목소리를 강조하는 배역으로 등장하며 ‘메멘토’의 새미 젠킨스로 등장했던 스티븐 토볼로스키의 젊은 시절도 엿볼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1992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되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이화예술극장에서 개봉 당일 관람했습니다. 서두와 전화 추적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보다는 함께 관람한 옆 친구가 더욱 신경 쓰였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국내 정식 발매된 dvd의 한글 자막은 번역의 매끄러움은 차치하고 맞춤법도 엉망일 정도로 형편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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