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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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 원작 매력 무시한 트란 안 홍 영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트란 안 홍에 의해 영화화되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이 영화화된 일이 드물다는 점에서 ‘상실의 시대’의 영화화는 애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하지만 트란 안 홍은 원작 소설의 매력을 포착해 영상으로 옮기는데 실패했습니다.

우려했던 캐스팅은 그런대로 무난했습니다. 주인공 와나타베 역의 마츠야마 켄이치는 다른 작품들에서 선보인 과장된 연기를 포기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나오코 역의 기쿠치 린코와 미도리 역의 미즈하라 키코의 캐스팅도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원작 소설의 이미지에 비교적 가깝습니다. ‘상실의 시대’가 작자 본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미도리 역의 미즈하라 키코와 현재 하루키의 부인인 무라카미 요코가 닮은 듯합니다. 나가사와 역의 타마야마 테츠지는 소설책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처럼 빼닮았습니다. 배우들을 뒷받침하는 의상과 세트도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 소설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중대한 요소들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우선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하루키의 작품들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무국적성에 근거한 쿨한 도시적 감수성이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만 트란 안 홍의 영화에서는 쿨한 도시적 감수성이 완벽하게 거세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인지 숲, 바람, 바다, 파도 등의 자연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노르웨이산 가구’가 아니라 ‘노르웨이의 숲’으로 하루키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을 감안하면 쓴웃음마저 유발합니다. 만일 원작 소설을 접하지 않고 영화를 먼저 관람했다면 ‘상실의 시대’가 애당초 자연친화적 소설이라는 착각을 심어줄 정도입니다.

소설 ‘상실의 시대’가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이유 중 하나는 섹스에 관해 적나라할 정도로 담백하게 묘사하며 극중에서 와타나베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규정하는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란 안 홍의 영화는 원작에서 중시했던 섹스와 인간의 따뜻한 체온에 대한 열망을 말장난 수준으로 폄하합니다. 대사는 적나라하지만 정작 영상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요양원에서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아름다운 알몸을 보여주는 환상적인 장면은 사라졌습니다. 기구치 린코가 이미 ‘바벨’에서 헤어누드 연기를 한 적이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어색합니다.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강도 높은 스킨십도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심지어 와타나베와 섹스하는 레이코 여사(키리시마 레이카 분)는 브래지어를 고스란히 착용하고 있습니다. 노출이 전부는 아니지만 ‘상실의 시대’의 영화의 노출은 원작의 솔직담백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결말에서 와타나베와 레이코 여사를 중심으로 한 섹스 장면의 노출이 부족한 것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극도의 상실감으로 인해 미도리를 애타게 찾는 원작 소설의 결말을 영화는 폄하합니다. 원작 소설에서 와타나베는 레이코 여사를 기차역까지 배웅하고 키스한 다음, 어딘지 모르는 공중전화에서 미도리에게 전화하는데, 영화는 와타나베가 레이코 여사를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서 배웅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며 두 사람은 키스하지도 않습니다. 죽은 나오코에 대한 가슴 아픈 추억을 공유한 두 사람의 치유 과정이었음을 트란 안 홍은 읽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 와타나베는 전화 통화에서 어디냐고 묻는 미도리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는데,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서 어딘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와타나베의 멍청한 대사는 썰렁한 코웃음을 유발합니다. 1960년대의 분위기를 재현한 건물이나 대형 세트를 제작하기 힘들었다 해도 결말의 역 장면을 무시하고 아파트 입구로 결말의 공간적 배경을 적당히 봉합한 것에서 트란 안 홍이 원작 소설의 결말이 지닌 비중을 얼마나 가볍게 받아들인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정합성 여부에 대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원제 ‘노르웨이의 숲’을 대신해 국내에 번역된 제목이자 영화의 개봉 제목이 ‘상실의 시대’가 된 것은 주인공 와타나베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묘사했기 때문인데 트란 안 홍의 영화 속 인물들로부터 스크린 너머로 상실감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오코의 상실감이 돋보일 뿐, 주인공 와타나베의 상실감은 미미하게 전달되며 미도리는 원작 소설에서 묘사된 상실감 따위와는 무관한 괴팍하고 변덕스런 인물로만 그려질 뿐입니다. 과거가 거세된 레이코 여사도 내면을 전혀 알 수 없는 밋밋한 인물로 한정됩니다. 133분의 적지 않은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흐름이 툭툭 끊기는 분절적인 전반부는 연출력의 한계를 노출합니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를 연출할 때, 대사 한 마디를 비롯해 소설 속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영화에서 재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문학과는 다른 나름의 방법론이 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디테일은 물론, 줄거리와 결말도 뒤집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작에 변형을 가한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영화를 연출한 감독에게 있습니다. 결과가 만족스럽다면 감독의 공이지만 반대로 실망스럽다면 감독의 과입니다. 게다가 트란 안 홍이 ‘상실의 시대’의 연출뿐만 아니라 홀로 각본까지 집필했다는 점에서 모든 책임은 혼자 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적 매력과 섹스에 대한 솔직함, 그리고 청춘의 상실감이라는 ‘상실의 시대’의 매력을 트란 안 홍은 무시했습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 실망스러웠던 트란 안 홍이 ‘상실의 시대’의 메가폰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하루키의 애독자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대지진과 교과서 왜곡과 같은 악재가 있기는 하지만 엄청난 독자층을 보유한 스테디셀러 ‘상실의 시대’의 영화에 대한 국내 흥행이 채 2만 명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영화에 대한 입소문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애독자들은 영화 ‘상실의 시대’를 통해 하루키의 소설이 다시는 영화화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 - 허세가 지나쳤던 트란 안 홍


덧글

  • 봉군 2011/05/09 20:23 #

    저도 봤을때 이건 뭐....원작을 좀 망친듯한 느낌이;;;
  • 역사관심 2011/05/12 05:05 #

    애초에 감독과 인물들을 보고 기대를 접었던 지라...
    자연친화적 소설로 보이게 할정도라... 그냥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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