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 인베이젼’은 전 세계가 외계인의 침략에 노출된 상황에서 LA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미 해병대원의 사투를 묘사합니다. 외계인이라는 SF 영화의 단골 소재와 전쟁 영화, 그리고 1인칭 시점의 재난 영화를 결합시켜 ‘에이리언’, ‘에이리언2’, ‘인디펜던스 데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 호크 다운’, ‘우주전쟁’, ‘클로버필드’, ‘디스트릭트9’, ‘2012’, 그리고 ‘스피드’까지 10여 개의 영화들을 연상시킵니다. 최근 오락 영화 중에서 기존 작품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창의적인 작품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월드 인베이젼’의 혼성 모방은 지나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월드 인베이젼’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다른 영화들을 모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나친 미국식 영웅주의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낸츠가 성조기에 경례하는 서두의 장면부터 심상치 않더니 116분의 러닝 타임 동안 내내 임무 완수와 민간인 보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미 해병대의 영웅적인 활약이 스크린을 메웁니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장교와 경험이 풍부한 부사관의 갈등은 영웅적인 희생으로 봉합되며 민간인 소년에게 해병대의 정신을 일깨우고 죽은 부하들의 군번을 외우는 장면은 주인공의 숭고함을 강조합니다.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행진곡 풍의 장엄한 배경 음악은 영웅적인 감수성을 고양시킵니다. 근래에 보기 드문 퇴행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영화인 셈입니다.
따라서 국내 개봉명 ‘월드 인베이젼(World Invasion)’보다 미국 개봉명 ‘Battle : Los Angeles’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리메이크한 ‘우주 전쟁(War Of The Worlds)’보다 미국의 서부를 상징하는 대도시 LA가 침략당한 것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는 의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9․11 테러에도 미국 본토 서부는 공격당한 적이 없다는 점에 착안한 영화가 ‘월드 인베이젼’, 아니 ‘Battle : Los Angeles’인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인들로서는 ‘월드 인베이젼’에 나름대로 감정을 이입하고 볼 수 있겠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인상적인 설정은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을 FA-18 전투기에 탑승시켜 영웅 놀음을 할 정도로 우파적이었던 ‘인디펜던스 데이’ 못지않게 ‘월드 인베이젼’은 노골적인 미국 우파 영화입니다. 대형 스타가 캐스팅된 A급 오락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전쟁 영화(혹은 재난 영화)와 달리 집단 주인공이 아닌 아론 에크하트가 분한 낸츠에게 철저히 집중하는 것은 영웅적 업적에 맞춘 초점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차라리 영웅주의 찬양보다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외계인의 침략에 파괴되는 LA 시가지를, 미군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는 바그다드 시가지로 은유했다면 보다 흥미로운 작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 영웅주의라는 이념을 차치해도 결정적으로 서사가 빈곤해 지루합니다. 특수 효과도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월드 인베이젼’을 점철하는 핸드 헬드와 개각도 촬영은 너무나 흔한 것으로, 적은 제작비와 빈곤한 상상력, 그리고 썰렁한 비주얼을 감추려는 얄팍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작년 연말 ‘스카이라인’이 개봉되었을 때 실망스럽다는 평과 함께 올 봄 개봉 예정인 ‘월드 인베이젼’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월드 인베이젼’은 매력적인 예고편이 전부였습니다.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지 않은 ‘스카이라인’은 결말의 비주얼과 반전이 나름대로 인상적이었지만 ‘월드 인베이젼’은 그만한 장점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월드 인베이젼’의 지구인과 외계인과의 시가전을 바라보며 최근 수 년 간 가장 빛나는 외계인 SF 영화였던 ‘디스트릭트9’이 얼마나 훌륭한 영화였는지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본편과는 무관하지만 지나친 의역과 과장된 번역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려한 한글 자막 또한 불만스러웠습니다.
태그 : 월드인베이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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