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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일본이 외면한 무의미한 전쟁 영화

1944년 6월 수세에 몰린 일본군 요충지 이오지마에 대한 미군의 상륙 작전이 감행되기 직전 부임한 사령관 쿠리바야시(와타나베 켄 분)는 부하들을 단 한 명이라도 더 생존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제빵사 출신의 일병 사이고(니노미야 카즈나리 분)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아내와 얼굴도 보지 못한 딸을 위해 편지를 씁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6년 작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인 이오지마 전투를 묘사합니다. 두 작품 모두 과거 회상의 형식의 액자 구성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아버지의 깃발’이 미군의 관점에서 본 이오지마 전투를 묘사하는 반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철저히 일본군의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일본군의 전멸로 이오지마 전투가 종료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에 극중의 일본군 병사들의 생존 가능성은 전무하며 적에게 죽거나 자살하거나 혹은 동료에게 살해당하는 세 가지 수단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합니다.

전쟁 영화가 설득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큰 스케일과 박력 넘치는 전투 장면이 우선시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요구됩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군인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습니다. 엇비슷한 군복을 입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다면 전쟁 영화는 자칫 지루한 스펙터클을 나열하거나 영웅적인 무용담을 선전하는데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호화 캐스팅을 통해 일본군의 다양한 군상을 포착합니다. 쿠리바야시와 사이고를 각각 중심으로 일본군 장교와 병사의 두 계급으로 서사가 구분되는데, 쿠리바야시를 지지하는 니시(이하라 츠요시 분)를 비롯한 일련의 장교들과 배격하는 이토(나카무라 시도우 분)를 비롯한 한 무리의 장교들이 갈등을 형성합니다. 실존 인물인 쿠리바야시와 니시는 미국과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자 육군 장교이지만 이토는 미국을 혐오하며 해군 장교라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절감하고 있는 군기 빠진 사이고와 헌병 출신으로 군기가 바짝 든 상병 시미즈(카세 료 분)도 미묘하게 서로를 의식합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신념으로 무장해 화해할 줄 모르는 고루한 장교들과 달리 병사들은 타협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명령권자인 쿠리바야시와 말단에서 이행하는 사이고는 수시로 교차하며 각각의 서사의 축을 이루는 두 주인공의 편지를 통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전개됩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바 있는 쿠리바야시의 서간집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영화화하는데 근간이 되었습니다.

일본 영화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더 쉽게 출연작을 접할 수 있는 와타나베 켄이 영어에 대한 부담을 털고 모국어인 일본어로 연기하는 모습은 퍽 자연스럽습니다. 헐리우드 배우라 칭해도 어색하지 않은 와타나베 켄이 미국의 일본 대사관 주재무관 출신의 미국 문화에도 친숙한 일본군 장성으로 분한 것은 당연한 캐스팅이면서도 흥미롭습니다. 부하를 아끼는 합리적 인물인 쿠리바야시의 사무라이와 같은 비극적 최후는 와타나베 켄의 첫 번째 헐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사무라이’를 연상시킵니다.

엘리트 장교 쿠리바야시와 대비되는 사이고 역의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큰 눈의 동안이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작은 체구로 인해 왜소한 일본인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보입니다. 사이고는 무의미한 전쟁에 강제로 끌려나온 평범한 민간인 출신의 의무병을 대변합니다. 따라서 애국심이나 사명감이 결여된 주인공 사이고의 시선을 통해 일본군의 ‘장렬한 옥쇄’는 광기의 산물로 묘사됩니다. 사이고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일몰은 일본의 패배, 즉 몰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헌병 출신이라 경계의 대상이 되지만 동료들의 죽음으로 사이고와 가까워지는 시미즈는 가장 어이없는 최후를 맞는 인물입니다. 역시 왜소한 체구이지만 진지함을 잃지 않는 이미지의 카세 료에게는 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미즈가 이오지마로 좌천된 이유는 설명되지만,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암시하는 복대의 출처에 관한 에피소드가 누락된 것은 아쉽습니다.

니시와 이토는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룹니다. 니시는 부하들을 아끼며 미군 포로에게도 인간적으로 대접합니다. 미군 포로 샘(루카스 엘리엇 분)과 대화를 나누며 위생병에게 치료를 지시하는 니시는 일본군 포로를 감시하기 번거롭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미군 병사와 대조를 이룹니다. 니시가 샘의 어머니의 편지를 번역하여 병사들에게 읽어주는 장면은 시미즈의 대사처럼 미군 역시 일본군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간임을 입증합니다. 반면 이토는 부하들에게 군기를 강요하고 전차를 탈취하겠다며 지뢰를 몸에 두른 채 돌격하는 극히 일본적인 장교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니시는 극히 일본적인 방식으로 자결하며 이토는 비겁하게 전선을 이탈해 포로가 되어 생존하게 됩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진귀한 작품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영화의 대부분은 연합군과 나치가 대결한 유럽 전선을 묘사하며 미군과 일본군의 태평양 전쟁을 묘사한 작품은 드뭅니다. 그나마 태평양 전쟁을 다뤄도 일본군은 ‘괴물’로 타자화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인들이 직접 출연해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드문 영화입니다.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독일에 비하면 과거사 청산과 반성에 극히 인색했던 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같은 작품이 일본인 감독이 아닌 미국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의해 연출되었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함께 연출된 두 작품을 굳이 비교한다면 ‘아버지의 깃발’보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일본군이 자초한 태평양 전쟁은 그야말로 어리석고도 무모한 전쟁이었습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아군 병사들의 목숨을 초개로 여긴 지휘부와 죽지 못해 안달한 장교들의 모습을 통해 얼마나 일본군이 야만적인 집단이었는지 일깨우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왜 이오지마의 비극이 일어났는지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며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타국을 침략하며 양민을 학살하다 자신들끼리 죽이고 자살한 더러운 과거와 그 근본 원인을 망각하고 오로지 원폭에 대한 기억만을 떠올리며 스스로 피해자인 양 자기연민에 빠져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이 이처럼 일천한 유아적 수준에 머문다면 동일한 비극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관람하고 일본 군국주의 미화, 비장한 사무라이 자결 문화 예찬, 혹은 일본군을 피해자로 묘사한 것으로 수용한다면 영화를 정반대로 오독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국내에 개봉조차 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국내에 DVD가 정식 발매되었지만 영화 본편의 자막은 일본어 대사를 영어로 옮긴 것을 한글로 중역을 했는지 의역과 누락으로 가득합니다. 일본어 특유의 어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 - 웨스턴의 전복, 그리고 종언
밀리언 달러 베이비 - 과대 평가된 수작
아버지의 깃발 - 정부의 전쟁 영웅 만들기에 희생된 병사들
체인질링 - 부패한 공권력에 맞서 싸운 모성
그랜 토리노 - 더티 해리는 늙어도 죽지 않는다
인빅터스 - 교과서적인 선전 영화 보는 듯


덧글

  • 라라 2011/02/11 10:14 #

    이토는 전후에 잘먹고 잘 살았겠군요.
  • ZAKURER™ 2011/02/11 10:29 #

    아마 한국인 입장에선 당혹스러우면서도 평하기 껄끄러운 영화에 속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와 별개로 이 영화 쪽이 '아버지의 깃발'보다 극적 긴장감이나 몰입감, 구성이 훨씬 더 나았다 싶지요.
  • 하텔슈리 2011/02/27 23:12 # 삭제

    이오지마전투의 일본군 21000명중에 생존자가 216명이었던가...

    영화 보면서 난 생각은 이거 하나입니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구 일본군 사령부 이 정신줄놓은 견공자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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