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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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와 정성일 감독과의 대화 영화

※ 본 포스팅은 ‘카페 느와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감독 데뷔작 ‘카페 느와르’는 극중에서 민음사와 열린책들의 번역본 소품으로 직접 제시되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문학에 빚지고 있는데, 문학이 빈사지경에 이른 현 시점에서 그 존재 의의를 되새기는, 쉽게 말해 ‘책 좀 읽으라’는 지독한 영화 마니아의 강권입니다.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이라는 긴 부제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현대인을 향해 영화의 원작이 된 두 작품은 그야말로 ‘소년소녀의 교양’에 불과하다는 질책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카페 느와르’는 ‘소년소녀’는 관람할 수 없는 등급으로 판정받았습니다.)

정성일 감독의 표현을 빌자면 ‘2시간 78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의 ‘카페 느와르’를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구와 달이 언급되는 종반 대사를 빌어 SF 영화라고 했지만, 갑자기 UFO가 등장하는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를 SF 영화로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작품의 실체와는 거리가 멀고, 제목에 ‘느와르’가 언급되며 권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의존했지만 3시간 18분의 러닝 타임 동안 총격전은커녕 유혈 장면조차 없습니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묘사된다는 점에서 멜로 영화임에는 분명한데, 극도의 문어체 대사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상호 간 대화가 아닌 상대를 앞에 두고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길게 읊조리는 독백과 다름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도 그의 말을 들어주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사랑이 이루어질 리 없습니다. 부조리한 사랑과 현학적인 대사들로 인해 ‘카페 느와르’는 브레히트의 희곡과 동일한 방식의 웃음을 자아냅니다. 따라서 ‘카페 느와르’는 코믹 멜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성일처럼 많은 영화를 찾아보는 이도 드문 만큼, ‘카페 느와르’는 인용과 패러디로 가득합니다. 김병옥이 출연해 망치를 팔며 ‘올드보이’를 언급하고, 박해일과 닮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의 김영필이 등장해 ‘괴물’을 언급합니다. 홍상수의 ‘극장전’은 직접적으로 인용됩니다. 다른 영화를 인용하며 일부 영화들은 스스로 사실적이라 차별화하기도 하지만 ‘카페 느와르’는 현실적인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와의 경계를 스스로 허무는 장면이 삽입되기 때문입니다. 김영필의 출연 장면에서 ‘괴물’의 괴물 출현이 실제 일어난 일처럼 언급되며, ‘극장전’의 인용 장면의 주인공 김상경은 후반부 직접 등장해 주인공 영수(신하균 분)의 사랑이 다시 실패했음을 확인 사살합니다. 영수는 동료 교사 미연(김혜나 분)과 비디오방에서 오럴 섹스를 하며 ‘극장전’의 김상경 등장 장면을 보는데, 영화 속 김상경이 극중 현실에 튀어나와 영수의 사랑에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홍상수의 영화 제목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언급됩니다. 따지고 보면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는 ‘먹물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홍상수의 영화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행정구역상의 서울특별시를 벗어난 거의 유일한 장면인 과천 서울대공원 장면은 ‘살인의 추억’을 미약하게 암시합니다.

한국 영화만 인용된 것은 아닙니다. 한 번도 내용물이 소개되지 않는 맥거핀인 선물 꾸러미와 함께 여러 차례 등장하는 빨간 풍선은 허우 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을 연상시킵니다. 1, 2부로 구분된 구성과 1부에 스쳐 지나간 선화(정유미 분)가 2부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에서는 왕가위의 ‘중경삼림’을, 영수를 잃은 미연이 인연의 온기를 느끼며 은하(요조 분)의 스쿠터를 타고 터널을 달리는 장면은 ‘타락천사’의 결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카페 느와르’는 오마쥬와 패러디에만 의존한 코믹 멜러만은 아닙니다. 최근 발간된 정성일의 저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영화를 통해 정치 현실에 두 발을 내딛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프닝에서 소녀(정인선 분)가 햄버거를 통째로 먹어 치우며 눈물을 흘리는 폭압적인 롱 테이크는,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를 환기시킵니다. 긴 러닝 타임 동안 거의 내내 떠나지 않는 서울 타워와 청계천은 각각 1970년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과 현 이명박 문민 독재 정권의 부산물입니다. 수직적으로 서울 및 서울 시민을 내려다보는 서울 타워와 수평적으로 흐르는 청계천을 담아낸 것은, 21세기 초반의 서울을 100년 뒤 회고할 때 참고 자료가 되고픈 욕망이 반영된 것이지만, KBS TV가 현장음을 소거했던 2008년 12월 31일 제야의 타종 행사의 이명박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현장의 생생한 육성이 담긴 장면처럼, 정성일 감독이 상영 종료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직접적으로 밝힌 바와 같이 정치의식이 노골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계천을 트래킹하며 전태일을 상기시키는 롱 테이크 컬러 장면과 영수와 미연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디 워 사태’의 주인공 진중권이 출연한 MBC ‘100분 토론’의 400회 특집의 인용 역시 동일한 의도가 반영되었습니다.

포옹과 오럴 섹스 장면이 등장하지만 멜러 영화에서 키스 장면이 없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포옹과 섹스의 중간 지점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로맨틱한 스킨십이 키스인데, 키스 장면이 없다는 것은 ‘카페 느와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엇갈린 사랑을 묘사하는 건조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벗은 몸을 제시하며 섹슈얼리티를 호소하는 유일한 장면의 주인공이 여중생 정윤(최정윤 분)으로, 로리타 콤플렉스를 강조한다는 점도 당혹스럽습니다.

하얀 화면에 제시되는 손 글씨와 내레이션이 동일하거나 반대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비슷한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 역시 당혹스럽습니다. 정성일 감독은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영화를 두 번 보라는 의미’라며 농담했지만, 관객의 의식을 분산시켜 도리어 집중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긴 러닝 타임을 덜 지루하게 만드는 두뇌 게임이자 막을 전환하는 장치와 같습니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문어체 대사, 암전과 함께 낭독되는 내레이션과 함께 연극적인 면모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고편에서는 거의 모든 장면이 흑백으로 제시되어 관람 전 두려움(?)을 안겼지만 다행히 ‘백야’를 인용한 후반부 장면부터 흑백 처리된 장면이 등장합니다. 선화가 등장하는 대다수 장면이 흑백이지만 춤을 추는 장면만큼은 컬러로 처리되어 그녀의 강렬한 생명력을 시사합니다. 영화 시작 1시간 40여 분이 지나 1부가 마무리된 후 영수가 서점에서 영화의 원전이 된 책을 찾아보는 장면과 함께 오프닝 크레딧이 뜨는데, 정성일이 자신을 ‘감독’이라 하지 않고 ‘연출’로 한정한 것도 독특합니다.

29일 아트하우스 모모의 6시 상영 종료 후 미연 역의 배우 김혜나와 함께 참여한 영화 상영 종료 후 대화 시간에서 정성일 감독은 남다은 평론가 및 관객들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영화제와 시사회를 제외한 첫 번째 정식 상영 직후라 설렘을 감추지 않은 정성일 감독은 영화가 지닌 정치적 의미에 대해 전술한 바와 같이 연출 의도를 숨기지 않았으며, 김병옥을 출연시켜 ‘올드보이’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등 웃음을 유도한 장면에서 관객들이 짓눌려 웃지 않는 것은 아쉬워했습니다. 롱 테이크로 처리된 선화의 춤 장면은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 맞춰 춤을 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춤에 자신이 없는 정유미가 7개월 동안 연습해 촬영한 8개의 테이크 중 한 개를 선택한 것으로, 삭제된 장면은 dvd의 부가 영상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정성일 감독은 영수의 죽음 이후 긴 에필로그를 통해 계속 살아가라는 주제 의식을 담았다고 피력했습니다.

김혜나는 정성일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술에 만취해 노 개런티로 출연하겠다고 말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고백했고, 엄청난 양의 문어체 대사는 첫 촬영 이후 익숙해졌으나 내레이션도 각본을 보지 않고 암기해 녹음한 것은 힘들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오럴 섹스 장면은 촬영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임했는데 완성된 작품을 보는 것은 당혹스럽다고 밝혔습니다. ‘꽃섬’ 이후 내세울 만한 작품이 없는 가운데 ‘카페 느와르’가 자신을 새롭게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며 만족했습니다. 김혜나와 함께 참여하기로 예고된 배우 정인선이 불참한 것은 아쉬웠지만 사회를 맡은 남다은 평론가가 관객들에게 많은 질문 기회를 할애하며 1시간이 훌쩍 넘는 충분한 대화 시간이 마련된 것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카페 느와르’는 분명 대중적인 영화는 아닙니다. 일면 독특하고 흥미롭긴 하나 장대한 러닝 타임과 흑백 처리된 상당수의 장면, 그리고 압도적인 문어체 대사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아쉬웠던 것은 ‘카페 느와르’가 문학과 다른 영화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며 ‘혼성 모방은 창조’라는 말도 있지만 오리지널리티의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론가 정성일의 독창적인 영화를 기대했다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엄청난 지식의 바다에 갇힌 듯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감독이 평론가로서의 명망이 없었다면 과연 ‘카페 느와르’는 알몸의 영화로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도 궁금합니다. 제작비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정성일이라는 이름은 디지털보다 필름이 더 잘 어울리는데, 필름으로 제작되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분명 정성일 감독이 바라는 바와 같이 ‘카페 느와르’는 21세기 초반의 서울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충실히 담은 레퍼런스의 위치를 점유하겠지만 영화사의 측면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문학의 영화화에 대한 여전한 열망을 숨기지 않은 정성일 감독의 차기작이 제작된다면 ‘카페 느와르’로부터 어떤 변화를 시도할지 주목됩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 영화 원리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