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9년 작 ‘블랙 레인’은 일본에서 야쿠자 중간 보스를 검거하려는 뉴욕 경찰의 좌충우돌을 묘사합니다. 부패에 자유롭지 못한 과격한 주인공, 그의 폭주를 제어하는 절친한 동료, 끝 모를 거대 폭력 조직, 살육을 즐기는 악당, 그리고 금발의 팜므 파탈까지 전형적인 느와르의 공식을 지녔습니다. 주인공이 공적인 입장에서 거악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복수를 실현하고자 악과 손을 잡는 것 역시 느와르의 설정입니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앤디 가르시아, 케이트 캡쇼, 후에 ‘철도원’으로 국내에 알려지게 되는 다카쿠라 겐, 그리고 ‘블랙 레인’을 유작으로 남기며 40세의 일기로 암으로 요절한 한국계 배우 마츠다 유사쿠까지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합니다.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감독 잔 드봉까지 스태프의 면면 또한 캐스팅에 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블랙 레인’은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답게 인상적인 영상으로 가득하지만, 125분의 러닝 타임을 서사가 꽉 채우지 못해 몰입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쿠자와 폭주족이 판치고, 일본도와 단지(斷指)가 횡행하며, 경찰은 고지식하고 무능한 치안 부재의 기괴한 국가로 일본을 묘사하는 오리엔탈리즘도 아쉽습니다. 미국의 핵우산 속에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막대한 대미 무역 흑자를 누린 일본에 대한 반감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장기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오프닝의 붉은 원이 지구의로 오버랩 되는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적이 되어 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던 일본이 경제동물이 되어 다시금 패권을 손에 넣으려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반영합니다. 오프닝에서 작품명의 영문을 세로로 표기하고, 엔딩에서 ‘完’이라고 표기한 것 역시 이국적 취향과 더불어 오리엔탈리즘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젓가락과 고개 숙이는 인사에 익숙해지며 닉이 일본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상대주의적 관점이나 작품명 ‘블랙 레인’이 의미하듯 미국의 원폭 이후 내리는 검은 비처럼 흉악한 살인자 사토를 미국이 낳은 사생아로 묘사하며 일본만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혐의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아무래도 미국적 편견이 우세한 것은 사실입니다. 개봉 당시만 해도 일본 문화가 세계적으로 대중화되기 전이었기에 한자와 카나가 뒤얽힌 원색의 네온사인이 난무하는 오사카의 풍경이 미국인 관객들에게 매우 낯설었을 것입니다. UIP 직배로 인해 개봉이 늦어졌던 국내에도 일본 대중문화가 당시 금지되어 있어 충격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블랙 레인’은 그로부터 7년 전 완성된 저주받은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의 아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쪽에는 오사카성이, 다른 한쪽에는 글리코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블랙 레인’의 오사카는 기모노를 입은 가부키 화장의 여인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블레이드 러너’의 2017년 LA와 닮았습니다. 찰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닉이 조이스(케이트 캡쇼 분)의 집으로 찾아가는 장면은 집으로 찾아온 레이첼(숀 영 분)을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가 만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조이스가 일하는 클럽은 레플리컨트 조라(조안나 캐시디 분)를 살해하기 위해 데커드가 방문하는 클럽과 닮았고, 닉이 마츠모토와 함께 노점에서 우동을 먹는 장면은 데커드가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는 장면과 유사합니다.
닉과 찰리, 그리고 마츠모토의 관계를 중심으로 ‘블랙 레인’을 분석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찰리는 사토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마츠모토에게 자신이 착용하던 넥타이를 선물하는데, 이는 닉의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마츠모토에게 인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찰리의 사후 닉은 유일한 조력자 마츠모토와 함께 행동하는데, 개인주의자 닉과 조직을 중시여기는 마츠모토의 대립은 미국와 일본의 문화 충돌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버디 무비의 두 주인공의 충돌은 관습적인 것이고, 미국과 일본은 엄연한 동맹국이며, ‘블랙 레인’은 일본 시장을 의식한 헐리우드 영화이니 결말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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