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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 무라카미 하루키 초기작의 원형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자전적 경험담을 독특한 기법으로 완성한 소설입니다. 미 보병으로 참전했으나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1945년 2월 10만 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하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묘사합니다. 제목 ‘제5도살장’은 작중에서 주인공이 머물렀던 드레스덴의 수용소 건물의 이름입니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커드 보네거트 자신을 상징하는데, 성지 순례자를 의미하는 ‘필그림(Pilgrim)’이라는 이름은 부제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즉, 무의미한 전쟁인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던 소년 병들이 북아프리카에 노예로 팔려나갔던 비극적 사실과 제2차 세계대전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참전해 목숨을 잃어야 했던 현실을 동일시합니다. 프롤로그에서 드레스덴 폭격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춰 집필 의도를 서술하고 있지만, 작품 속에서 드레스덴 폭격이 술회되는 부분은 짧으며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제5도살장’의 진정한 주제 의식은 무수히 반복되는 문구 ‘그렇게 가는 거지’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전쟁에 희생된 인명뿐만 아니라 전쟁과 무관한 인명 및 동물의 죽음까지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체념과 같은 문구가 반드시 뒤따르는데, 처음에는 비극성을 심화시키는 이 문구는 반복되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며, 결국에는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지기에, 인명 경시의 전쟁의 본질을 깨닫게 합니다. 이를테면 미군 에드가 더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노골적으로 암시되며, 이후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반드시 그가 맞이할 죽음이 질리도록 반복되더니, 정작 죽음에 이르러서는 간략한 묘사에 그친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그러므로 ‘제5도살장’은 드레스덴 폭격을 고발한다기보다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는 모든 전쟁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에는 하루키의 초기작의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하루키는 카페를 운영하며 틈틈이 집필할 수밖에 없었기에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매우 짧은 에피소드의 나열로 구성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나, 그 구성방식은 ‘제5도살장’을 답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서사와는 무관한 환상적인 시공간의 에피소드가 삽입되는 등의 SF적 요소와 펄프 픽션에 대한 호감, 간결한 문체와 재기 넘치는 블랙 유머, 그리고 작가 자신이 직접 그린 애교 섞인 삽화까지 모두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초반부에 언급되는 가상 작가 데레크 하트필드는, ‘제5도살장’을 비롯해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가상 작가 킬고어 트라우트를 연상시킵니다. 킬고어 트라우트가 커트 보네거트의 분신이라면, 데레크 하트필드는 하루키의 스승이라는 점 정도가 다릅니다.

번역본은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가벼운 지질의 페이퍼백으로 출간되었는데, 어지간한 중단편 소설조차 양장본으로 출간하여 휴대 및 보관이 부담스럽고 쓸데없이 단가가 상승하는 국내 출판계의 풍토에 비하면 매우 바람직합니다. 아마도 킬고어 트라우트의 작품들처럼, 커트 보네거트도 자신의 작품이 양장본보다는 페이퍼백이 더 잘 어울린다고 지하에서 생각할 것입니다.


덧글

  • 2010/11/29 10:2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회색인간 2010/11/29 13:13 #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형은 커트보단 레이먼드 챈들러고 실제로 많은 작품이 필립말로의 오마주같았는데 말이죠.....
  • R쟈쟈 2010/11/30 09:46 #

    간략했지만 뒷맛은 무거웠던게 드레스덴 쪽 묘사였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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