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버트 A. 하인라인의 걸작 SF 소설을 영화화한 1997년 작 ‘스타쉽 트루퍼스’는, 폴 버호벤의 연출작답게 기괴한 작품입니다. 우선 그의 전작 ‘로보캅’과 ‘토탈 리콜’과의 유사점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래상을 가상의 뉴스 화면과 CF를 활용해 제시한 장면이나 사지가 절단되고 유혈이 낭자한 고어 장면이 그렇습니다. 폴 버호벤은 전작들에서 인명이 경시되는 현실을 고발하며 인간성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무수한 군인들이 전투에서 사지가 절단당하며 죽어가는 ‘스타쉽 트루퍼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연합군의 육군 병사들이 착용하는 헬멧은 로보캅의 헬멧과 닮았고, 조니가 정신을 잃은 뒤 화면에 노이즈가 번진 후 깨어나는 1인칭 시점의 장면은 머피의 죽음으로 노이즈 화면이 삽입된 후 로보캅으로의 부활 장면과 유사합니다.
‘스타쉽 트루퍼스’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군 복무를 마쳐야만 시민권을 얻고 투표에 참여할 수 있으며, 지구 연합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군인입니다. 언론은 전쟁의 정당성을 끈임 없이 시민들에게 주입합니다. 전쟁에 반대는커녕 의문조차 제기하는 이 없습니다. 연합군의 군복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의 그것을 빼닮았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입대를 권하고, 엘리트는 입대하여 좋은 처우를 보장받으며, 대학 진학을 원하는 고교생은 보이지 않습니다. 병영 국가에 ‘시민’은 있지만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적을 감정 이입이 불가능한 ‘벌레’로 설정한 원작자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우파적 주제 의식을, 폴 버호벤은 충실히 재현하는 듯하면서 조소하는 것으로 군사 독재 및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1959년 출간된 원작 소설에는 포함될 수 없었던 월남전에 대한 은유를 삽입합니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은 미국의 월남전 참전을 지지한 바 있습니다.) 멋모르고 입대해 부당한 전쟁을 즐기려 했던 소년이 엄혹한 훈련을 거쳐 실전에 투입되어 동료를 잃는 과정은 월남전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입니다. 하지만 클렌다투의 외계인, 즉 벌레에게도 지능이 있으며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외계인에 대한 침략과 무차별 학살을 즐기는 지구인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도록 연출합니다. 외계인의 우두머리인 두뇌 벌레의 입은 여성의 성기와 닮았는데, 두뇌 벌레를 생포한 후 고문 기구를 입에 쑤셔 넣는 장면은,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부 화면을 가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도리어 모자이크 처리된 가학적인 포르노를 연상시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초반의 공간적 배경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인데, 현재 아르헨티나의 수도이지만, 극중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됩니다. 헐리우드 영화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뉴욕이나 LA가 아닌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영어를 사용하도록 설정한 것은 팍스 아메리카나 혹은 미국 중심의 세계화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는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지만 흥행에는 참패했습니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우선 원작의 상징과도 같은 파워드 슈트(강화복)을 삭제하여 흥미를 반감시켰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을 비롯해 무수한 SF 작품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파워드 슈츠가 배제되면서 관객들이 기대했던 힘 있는 액션보다는, 파워드 슈트가 없어 무방비로 노출된 보병의 신체가 절단당하는 고어가 강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머와 고어, 멜로가 뒤얽혀 서사가 일관성을 잃고 감정선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디지(디나 메이어 분)가 탱커 버그의 입 속에 수류탄을 명중시키는 장난스런 연출 직후 아라크니드의 공격에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이나, 잰더(패트릭 멀둔 분)가 참혹하게 전사한 직후 잰더와 연인 관계였던 카르멘이 조니와 재회해 감정을 확인하는 장면 등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떻게 감정을 이입하며 영화를 관람해야 하는지 당혹스럽게 합니다. 학원 연애물에서 출발해 전쟁 고어물로 갑작스레 전환된 서사 구조와 종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마무리된 미진한 결말 또한 약점입니다. 애당초 폴 버호벤이 속편을 연출하지 않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흥행 참패로 인해 ‘스타쉽 트루퍼스’의 속편은 B급 저예산 영화로 전락했습니다. 폴 버호벤 역시 ‘스타쉽 트루퍼스’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어 한 번도 블록버스터를 연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괴함이야말로 진정한 매력입니다. 애당초 SF가 순수 문학과 달리 풍부한 상상력과 비쥬류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에 앞장서 왔으니, 기괴함으로 전체주의와 인명 경시를 고발한 ‘스타쉽 트루퍼스’야 말로 SF 본연에 충실한 영화였던 것입니다. 1997년 작으로 CG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아 아날로그 SF에 대한 향수를 일깨우지만, 동시에 현 시점에서 다시 봐도 특수 효과에 어색함이 없는 것 또한 장점입니다.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나 ‘스타쉽 트루퍼스’는 아날로그의 흔적이 남은 마지막 SF 대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1997년 당시 한국에서도 상당한 흥행을 기대했는지, 피카디리(지금은 롯데시네마에 흡수) 입구에 거대한 탱커 버그 모형을 전시하고, 연합군 보병으로 코스프레한 행사 인원이 극장 입구를 지켰으며, 당시에는 드물었던 주연 배우(캐스퍼 반 디엔)의 내한 무대 인사까지 포함된 성대한 유료 시사회까지 열렸지만, 역시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후 캐스퍼 반 디엔은 ‘슬리피 할로우’의 조연 외에는 이렇다할 출연작 없이 TV 드라마를 전전하고 있고, ‘천재 소년 두기’의 이미지를 재활용한 칼 역의 닐 패트릭 해리스 역시 캐스퍼 반 디엔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나마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은 것이 데니스 리차즈이지만, 출연작보다는 찰리 쉰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더 유명해지게 됩니다.
로보캅 - 풍부한 텍스트, 감동의 오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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