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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 나가토 유키의 우울 애니메이션

※ 본 포스팅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은, 타니가와 나가루 원작의 ‘스즈미야 하루히’ 소설 시리즈 중 4권에 해당하는 동명의 작품을 애니메이션화한 첫 번째 극장판입니다. 고교생 쿈이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동아리 SOS단의 친구 스즈미야 하루히가 갑자기 사라진, 세계의 어긋남을 되돌리기 위해 분투한다는 내용입니다. 제목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이지만, 실은 하루히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정확한 의미를 따지면 ‘소실’은 아닌 셈입니다.

번역본 24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소설을 163분의 러닝 타임에 담아 스크린으로 옮겼는데, 오프닝과 엔딩, 그리고 광고를 제외한 TV판 애니메이션 한 편의 러닝 타임이 20분 정도임을 감안하면,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은 TV판 1쿨에 필적하는 엄청난 분량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1쿨 분량의 TV판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스크린에 내걸은 듯합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은 독특한 위치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입니다. TV판의 재편집에 불과한 극장판이나 완전한 오리지널 극장판,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TV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지 않았던 소설 한 권을 통째로 영상화하여, 극장판다운 속도감이나 스케일을 추구하기보다 원작 소설의 충실한 재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따라서 소설, 혹은 TV판을 접하지 않아 사전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관람한다면, 극중에 언급되는 ‘존 스미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고, 쿈의 압도적인 분량의 투덜거림이 지루할 수밖에 없으며, 왜 쿈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엔드 크레딧 말미에서 ‘Special Thanks All Fans’라고 명시했듯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은 철저히 팬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하루히가 소실된 세계에서 쿈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나가토입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평상시의 나가토와, 쿈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체취의 나가토가 대비됩니다. 쿈을 제외한 다른 네 명의 SOS단 캐릭터들이 모두 두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나가토만큼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캐릭터는 없습니다. 쿈에게 문예부 가입원서를 내미는 장면과 저녁 식사를 함께할 것을 권하며 옷자락을 잡는 장면을 비롯해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나가토의 표정은 보호본능을 강렬히 자극합니다.

소설을 충실히 반영했기에 극장판만의 변화는 크게 눈에 띄지 않지만, 유독 종반부 쿈과 나가토의 옥상 장면만큼은 차별화가 두드러집니다. 소설에서 두 사람의 재회는 실내인 쿈의 병실에서 이루어졌으나, 극장판에서는 실외인 병원 옥상으로 옮겨집니다. 시가지의 아름다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눈이 내리자 ‘나가토. 미안해. 유키(雪).’라고 언급하는 대사는, 쿈이 나가토를 성(姓)이 아닌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는 중의적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쿈은 나가토에게 중세의 기사처럼 무릎을 꿇고 손을 잡으며 그녀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소설과 달리 스크린에 걸맞은 로맨틱한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이 내리고 나가토의 이름 유키가 강조되는 연출은 소설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이 아닌 소설 8권 ‘스즈미야 하루히의 분개’의 ‘편집장★일직선!’의 나가토 유키의 자전적 소설과 이토 노이지의 일러스트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지만, 세계로 원래대로 되돌리려 하는 것은 쿈이 하루히를 사랑하기 때문이나, 하루히의 뒤치다꺼리에 시달려야 했던 나가토의 우울을 들여다 본 쿈은 애틋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은 쿈과 하루히, 나가토의 삼각관계가 서사 구조의 근간이라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코이즈미의 부러움과 아사쿠라의 질투가 겹쳐지며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은 상당히 복잡한 애증 관계로 얽혀있습니다. (후반에 등장해 어느 정도 활약하지만, 미쿠루는 서사의 큰 줄기에서 소외되어 비중이 미미합니다.) 이를 통해 쿈과 하루히, 나카토는 학원물의 10대 주인공답게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합니다. 쿈과 하루히는 친구들을 더욱 아끼게 되며, 나가토는 자신의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집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가 세카이계의 효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레이를 빼닮은 나가토가 쿈의 맹세에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은, TV판과 여러 버전의 극장판을 거치며 향상된 작화로 윤색된, 신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레이의 수줍은 미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존의 세계를 선택하는 이유에 대해 쿈이 또 다른 자신과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비슷한 문제를 고뇌하던 신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엔드 크레딧 이후에는 나가토가 시립 도서관에서 홀로 책을 읽다, 도서 카드를 작성하는 어린 소년, 소녀 커플을 묵묵히 바라보는 장면이 추가됩니다. 나가토에게 도서 카드를 처음 만들어준 쿈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루히가 소실된 세계에서 나가토는 12월 18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1999년 5월 발행된 신초샤의 신장판을 읽고 있는데, 두 세계를 방황하는 한 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마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을 관람한 것은 개봉 첫날인 어제로 용산 CGV의 첫 회에 해당하는 4시 45분 상영이었는데, 평일 낯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만석에 가까웠습니다. 전체 관객의 90%는 남성으로, 소설 혹은 TV판을 이미 접해 사전 지식이 풍부한 분위기였습니다. 상영 종료 후 거의 모든 관객이 엔드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나가토의 성우 치하라 미노리의 아카펠라 곡 ‘상냥한 망각’을 감상하고 나가토가 등장하는 추가 장면까지 관람한 후 극장을 나섰습니다. 하루히의 거침없는 삿대질과 나가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대형 스크린으로 비교한 후, 아마도 자신이 동일한 상황에 놓였다면 쿈과는 상반되는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덧글

  • DAIN 2010/11/12 09:55 #

    의외로 주변 관람 환경이 생각보다 큰 변수가 되었습니다. 원작을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별 반응도 없고 무미건조한 관객들과 함께 보니 이건 일종의 폐쇄공간 체험이더군요. 차라리 극장 전세내고 혼자보는 기분이었으면 스스로 반응하는 재미라도 있었을 텐데.
  • 카오스95 2010/11/12 10:18 #

    다른 감상문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영화보면서 '노는 것' '반응하는 것'을 엄청 민폐라고 표현하니까요.
    자유주의가 오덕계에까지 퍼진 예시죠. (선악을 판단하는 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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