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제의 애니와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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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김기덕 영화 영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속전속결로 촬영하며,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서있고, 국내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지지와 비난으로 엇갈리며, 흥행은 신통치 않지만, 해외 영화제의 상을 쓸어오다시피하는 국내 영화계의 이단아인 김기덕의 ‘빈집’을 보게 된 것은 올해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감독상 선정에 앞서 20세 이하의 젊은 심사 위원들이 투표로 선정한 ‘미래비평가상’ 수상 때문이었죠. 이미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김기덕의 영화에 대해 기존의 베니스의 평론가들보다는 편견 없이 보았을 터인 젊은(어린?) 영화 키드들의 판단이 더 정확할 것 같았으니까요.

‘빈집’은 대사가 극도로 절제된 작품입니다. 남자 주인공 태석으로 분한 재희는 러닝 타임 내내 대사가 한 마디도 없으며 여자 주인공 선화의 이승연의 대사는 비명을 포함해 고작 세 마디 뿐입니다. 88분의 러닝 타임은 최근의 추세로 보면 짧은 편이지만 대사가 저렇게 절제되어 있다면 지루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빈집’은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벌써 끝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가학과 피학의 폭력, 의사 소통의 부재, 사람이 없는 빈집으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공허함,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 등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기를 꺼려하는 김기덕 영화의 특징은 ‘빈집’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부담스러운 작품은 아닙니다. 난해하지도 않습니다. 중간중간에 실소를 자아내는 장면도 있습니다. 결말도 해피 엔딩에 가깝고 ‘이해’에 대한 희망도 보입니다. 한옥 마을의 부부 역시 내막은 잘 모르지만 선화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일정 정도 희망을 말한다는 점에서 베니스의 영화 키드들이 그랬듯이 편견 없이 본다면 긍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안부 누드 파문 이후 이승연을 캐스팅하겠다는 영화 감독은커녕 방송국 PD도 없었습니다. 김기덕이 그런 그녀를 캐스팅한다고 밝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슈 거리를 만들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며 김기덕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빈집’에 이승연을 캐스팅한 것은 대단히 적절했습니다. 저는 ‘연예인 이승연’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여하튼 누드 파문 당시 이승연에 대한 한국 사회의 비난은 이승연 개인에게는 가학적이라고 느껴질만큼 과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그녀가 ‘빈집’의 첫장면에서부터 얼굴에 맞은 상처를 분장하고 등장했을 때에는 이미 김기덕이 누드 파문까지 치밀하게 계산한 후에 등장시킨 것임에 틀림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승연의 피학적 이미지를 활용한 것이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이승연의 누드 사진까지 영화 속에 등장시키는 것을 보니 보통 대담한 감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더군요. 브라운관에서 보던 이승연과 스크린에서 보는 이승연의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빈집에 대담하게 들어가는 태석 역의 재희의 눈매가 사진으로 보던 김기덕 감독의 도발적인 눈매와 비슷하던데 기존의 한국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럽 영화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양산하는 김기덕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빈집’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차고 들어가 버티고 앉아 있는 감독인 것 같습니다.

덧글

  • hardboiled 2004/10/21 05:24 #

    아, 정말로! 님의 리뷰로 족하니, 이 몸은 쓰지 않으려오.
  • 디제 2004/10/21 07:44 #

    hardboiled님/ hardboiled님의 블로그의 글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과찬이시라 쑥스럽군요.
  • 경이 2004/10/21 18:28 #

    김기덕표 영화를 몹시 껄끄럽게 느껴왔기 때문에..이 영화,아직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디제님도 평하셨듯이 가장 대중적이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김기덕표 영화라고 듣긴 했지만..전작들을 보고난 후유증이 너무 심했었기 때문에 계속 고민중이죠.
  • 자이젠 2004/10/21 21:51 #

    김기덕의 열렬한 팬입니다. 안녕하세요, 첨입니다.

    이번 주말에 여행을 가는데, 그곳에서 빈집에 대한 감상을 써 볼까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잘 읽었구요..
  • 디제 2004/10/21 22:53 #

    경이님/ 보통 김기덕 영화가 여자분들에게 껄끄럽게 다가서기 때문이시겠죠. 하지만 '빈집'은 오히려 여자의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자이젠님/ 자주 놀러오십시오. ^^
  • zenca 2004/10/21 22:54 #

    저도 볼 영화가 하나 더 생겼군요.^^
  • 시진이 2004/10/23 05:17 #

    김기덕을 싫어하는 이들조차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해요. 불쾌하기는 커녕 관객들이 소리내어 웃으며 영화를 봤을 만큼 이전과는 자신의 메시지를 부드럽게 표현해낸 것 같아요.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 중에, 아마 <빈 집>의 주인공들이 가장 행복한 인물들일거에요.
  • 디제 2004/10/23 12:30 #

    시진이님/ 저는 김기덕 영화를 '빈집'으로 처음 본 것이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빈집'은 해피엔드에 가까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유메 2004/11/21 14:13 #

    김기덕 감독님은 천재인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흥행이 많이 못하지만..
  • 볼링매니아 2005/02/20 14:37 # 삭제

    글 재주가 정말 좋으신데다 비평 또한 정확하시네요.
    대단합니다. 일반적인 비평가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네요.

  • 재희오빠ㅠㅠ 2005/02/20 20:12 # 삭제

    전 재희오빠의 그런 모습을 첨봐요... 전 재희오빠가 그런영화를 다신 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놀란가슴진정되지 않네요...
  • 해일 2008/10/31 00:54 #

    저도 <나쁜남자>에 놀란 가슴 김기덕 감독님보고 놀라던 사람 중에 하나인데요! 빈집은 정말 김기덕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였어요. 새벽에 별 감흥없이 보기 시작했다가 두근두근 긴장해서 봤던 기억이 나요. 공감되는 글이라 글 남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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