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사의 흥행 기록을 새로 쓰는 ‘아바타’에 대해 국내 평단은, 최초 공개 시에는 미증유의 3D 영상에 압도당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개봉 당시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평론가 집단 특유의 냉정함을 되찾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아바타’를 ‘퇴행 동화에 불과하다’거나 ‘자본을 앞세운 기술적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하는 평론을 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에 걸친 포스팅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아바타’의 서사는 새로움이나 복잡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생소한 미지의 행성 판도라를 배경으로 한 3D 영상에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서사 구조의 복잡성을 배제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카메론의 영화들은 그의 출세작 ‘터미네이터’에서 ‘타이타닉’에 이르기까지 오락 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난해한 영화들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카메론은 매끈한 오락 영화를 추구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적 도전들을 대부분 성공으로 귀결시켰습니다.
따라서 ‘아바타’ 역시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매끈한 오락 영화’라는 카메론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카메론은 애당초 평론가들이 선호할 만한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요소들로 가득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영화는 여성주의적 메시지나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 거대 자본에 대한 우려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러한 요소들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이 카메론이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는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카메론은 관객이 오락 영화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 속성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리한 감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시간과 비용을 투입해 그에 상응하는 효용을 요구하는 관객의 속성을 명확히 파악하여, 추가 요금을 부담하더라도 자신의 3D 영화를 보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감독입니다.
따라서 ‘아바타’에 투입된 막대한 자본이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으니, ‘아바타’는 자본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카메론이 아닌 다른 영화감독이, 카메론과 동일한 수준의 자본과 제작 환경을 부여받는다면 얼마든지 카메론과 동일한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특정 수업을 동일한 교재를 지닌 두 명의 학생이 동시에 참여한다면, 그들이 동일한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이 단선적인 논리와 유사한 것입니다.
‘아바타’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전우치’에 대한 동정론도 섣부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동훈 감독에 카메론과 동일한 자본이 주어지면, ‘아바타’에 필적할 만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 예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바타’의 제작을 위해 12년의 공백을 두고 3D 기술에 매달려 발명하다시피 한 카메론의 노력과 성과를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게다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기술적 완성도는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눈을 사로잡지 못한 영화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실패한 영화들과 ‘아바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한 평론가들의 진지한 논의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바타’에 적용된 3D 기술에 대해 ‘기술적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한 것 역시 정당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아바타’를 ‘기술적 발명품’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3D 기술의 보급으로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기존의 개념이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영화는 ‘발명’으로 비롯되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예술적 완성도나 서사 구조의 완결과 같이, 현대 영화에서 평론가들이 요구하는 요소들을 충족시키는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닙니다. 영화는 20세기 중반을 전후로 언제나 대자본의 투입의 결과물인 기술적 변화의 최첨단에 위치했습니다.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 그리고 CG 기술의 투입으로 항상 변신해 왔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표현 방식과 기술적 요소들의 변화가 나타날 때마다, 평론가들은 영화의 본질이 파괴당한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CG를 앞세운 영화들이 속속 스크린을 메우자, 평론가들은 CG로 인해 영화의 본질이 파괴될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CG를 활용한 현재의 거의 모든 영화들은 영화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할 때, 미국의 관객들만을 대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나 인종 차별 등이 버젓이 드러난 장면이 삽입되었던 시대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관객들까지 염두에 둔 ‘공정성’이라는 잣대가 중시되는 시대의 영화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평론가들이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정의는, 사실 20년 전, 아니 10년 전의 그 자신의 영화에 대한 정의와도 다를 것입니다.
두산백과사전에 의하면 영화는 ‘연속촬영으로 기록한 필름상의 화상(畵像)을 스크린에 투영(投影), 움직임 있는 영상을 보여주는 장치 및 그렇게 만든 작품’이라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상영이 일반화된 현시점에서는 이미 어긋난 정의입니다. 즉, 영화는 백과사전의 정의조차 무색케 할 정도로, 생물과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장르인 것입니다. 3D를 전면에 내세운 ‘아바타’가 영화라는 대중 오락물에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불어넣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아바타’의 등장 여부와 무관하게 영화는 분명 변화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이런 작품은 훌륭하므로 봐야 하며, 이런 작품은 퇴행에 불과하기에 보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평론가의 논리는, 뒤집어 보면 엘리트주의적인 우민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아바타’가 평범한 흥행 성적을 남기고 사라졌다면, 평론가들도 분명 지금과는 다른 자세를 취했을 것입니다.
평론가들은 2시간의 백일몽을 충족시키는 매끈한 오락 영화를 죄악시해왔습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형편없는 영화보다 더욱 경계해왔습니다. 대중들이 영화에 빠져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직업이 아닌 일반 대중이 영화를 통해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 2시간 동안 백일몽을 꿈꾸는 것이 죄악인지 의문입니다. 어쩌면 평론가들이 진정 못마땅한 것은 ‘아바타’나 카메론이 아니라, 엄청난 흥행 성적을 창출시키는, 극장에 늘어선 열광적인 대중들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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