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존 힐콧 감독이 영화화한 ‘더 로드’는 지옥이 현실이 된 아비규환 속에서도 아들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의 진한 부성애를 묘사합니다. 지진과 화재 등 대형 재해가 반복되며, 교통과 통신을 비롯한 기초적인 사회 인프라가 붕괴되고 화폐조차 무의미해져, 황폐한 불모지만 남아 갱단이 식인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는 암흑기에, 사내는 아들을 바르고 강하게 키우고자 노력합니다. 다른 이를 먼저 공격하지 않으며, 아무리 굶주려도 식인만큼은 피하려 합니다. 동시에 아들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려 안간힘을 다합니다. ‘더 로드’는 극한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부자의 여정을 뒤따르며 문명이 사라진 시대에 과연 윤리가 제 구실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지는 로드 무비입니다.
로드 무비라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고난 속의 성장담입니다. 아버지를 방패삼아 아들은 처참한 세상에서 생존을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는 언젠가 닥칠 자신의 부재를 상정하고 아들을 가르치는데, 이를 통해 아들은 순수한 소년에서 올곧은 성인으로 서서히 성장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들 역의 코디 스미스 맥피가 그의 어머니로 분한 샤를리즈 테론과 용모가 매우 흡사해 실제 모자 관계처럼 보이며, 주인공인 사내로 하여금 아들을 볼 때 마다 아내와의 추억을 고통스럽게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더 로드’는 특별한 사건 없이도, 담담함과 잔잔함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와 배우의 힘으로 몰입시키는 독특한 영화입니다. ‘2012’처럼 재난을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어떤 재난이 왜 벌어졌는지 구체적으로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난을 그들의 시각에 의해서만 묘사하기에, ‘우주전쟁’과 ‘나는 전설이다’, 그리고 ‘미스트’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해피 엔딩이었던 ‘우주전쟁’이나 냉소적 비극으로 마무리 된 ‘미스트’보다, ‘더 로드’는 ‘나는 전설이다’에 가깝습니다. 굳이 비교하면, ‘나는 전설이다’가 텅 빈 도시에 홀로 정착해 나름대로 즐기듯 문명화된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로버트 네빌이 좀비들과 싸워 나가는 무용담이라면, ‘더 로드’는 끊임없이 식량을 찾아 떠돌 수밖에 없는 부자가 갱단을 비롯한 모든 타인들과 투쟁해야 하는 여행기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공간적 배경이 원색의 도시였던 ‘나는 전설이다’가 상당히 오락적이었다면, 잿빛으로 점철된 숲과 바다가 상징하는 ‘더 로드’는 매우 진지합니다. 인간 사냥 및 식인 풍습과 같은 잔혹한 장면을 앞세워 고어 영화적 성격을 강화하거나, 추격전을 내세워 스릴러와 같은 긴장을 유발하거나, 혹은 신파적 분위기로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고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마지막 장면까지 자제의 미덕을 잃지 않기에 상당한 여운을 남기며, 엔드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음향은, 영상 대신 에필로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더 로드’에는 조연으로 로버트 듀발과 가이 피어스도 출연하는데, 이들이 출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관람할 경우, 많지 않은 등장인물 속에서도 분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잿빛 영상과 배우들의 분장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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