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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 - 풍부한 텍스트, 감동의 오락영화 영화

크리스마스이브에 중소도시의 3층짜리 극장 2층에서 ‘로보캅’의 첫 날 첫 회를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기억이 2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목과 포스터의 이미지는 영락없는 아동용 영화였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상당수의 장면이 삭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생이 감당하기 힘든 폭력 묘사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로보캅’은 폭력 미학 그 이상의 매력으로 압도하는 걸작 오락영화였습니다.

폴 버호벤 감독의 1987년 작 ‘로보캅’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디트로이트의 경찰관 머피(피터 웰러 분)가 갱들에게 살해당한 후 로보캅으로 부활해 복수한다는 내용입니다. 단 한 줄로 요약될 수 있는 단순한 플롯을 비교적 짧은 102분의 러닝 타입으로 압축하면서도, ‘로보캅’은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상징들을 곳곳에 삽입해 풍성한 텍스트로 탄생했습니다.

머피의 죽음과 로보캅으로의 부활은 주지하다시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은유입니다. 머피가 클라렌스(커트우드 스미스 분) 일당에 희롱당하다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것은, 유태인들에게 희롱당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살해당한 예수와 닮았습니다. 머피가 만신창이로 살해당하는 뒤편으로 공장의 뿌연 창문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연출된 것은 머피가 구세주로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공간적 배경이 미국 최대의 자동차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라는 것을 강조하듯, 클라렌스 일당과 최후의 결투를 벌이는 곳 또한 공장입니다. 클라렌스 일당과의 악연은 공장에서 시작하고 끝난 셈입니다. 로보캅은 클라렌스를 생포하기보다 살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데, 그가 총을 꺼내들고 의지를 표명하는 장면에서, 예수가 기적을 행한 것처럼 물 위를 걷습니다. 머피의 죽음과 로보캅의 부활을 함께 하며 무한한 신뢰를 보낸 여경 루이스(낸시 앨런 분)는 막달라 마리아에 비견될 만합니다.

터미네이터’와 함께, 지금은 사라진 영화사 오라이언의 몇 안 되는 흥행작 중 하나인 ‘로보캅’은, 소련과의 군비 경쟁이 극에 달해 ‘스타워즈’라는 허무맹랑한 전략적 방위 계획이 시대를 풍미한 ‘레이거노믹스’의 상징인 근육질 영웅을 요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가 농후합니다. TV 뉴스를 통해 드러나는 영화 속 근미래는 ‘스타워즈’ 계획의 오류로 인한 대량 인명 살상이 난무하고, 중남미는 내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아프리카는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상 CF에 등장하는 가족용 게임에서는 어린이조차 부모와 함께 군비 경쟁과 핵전쟁을 즐깁니다. 초반부 로보캅의 라이벌 로봇인 ED-209의 오작동으로 OCP 간부가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해도 다른 간부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ED-209의 오작동을 안타까워하는 분위기입니다. 폴 버호벤이 폭력적인 연출을 즐기는 감독이기도 하지만, 레이건 집권기 당시 미국의 인명 경시 풍조를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장면뿐만 아니라 작품 전반에 냉소적인 유머로 가득합니다.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아닌 대기업이 경찰력을 소유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기업 간부가 갱과 결탁했다는 것은 매우 부조리한 상황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노조 설립을 방해하고 철거민을 탄압하기 위해 기업이 고용한 용역 깡패가 동원되는 현실을 보면, ‘로보캅’ 속 가상 현실이 SF가 아닌 것 같아 씁쓸합니다. 여피는 마약과 매춘에 찌들어 있으며, 서민들은 저속한 시트콤을 즐겨 시청하는 영화 속 현실은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로보캅은 클라렌스 일당의 배후인 딕(로니 콕스 분)을 체포하기 위해 OCP 본사에 올라왔다, ‘OCP 간부는 체포할 수 없다’는 ‘4번 조항’으로 인해 ED-209와의 대결에서 힘 한 번 못 써보고 밀리고 지하에서도 경찰들의 난사에 무수히 상처를 입고 간신히 루이스에 구출됩니다. 클라렌스 일당을 처치한 로보캅은 OCP 본사로 돌아와 ED-209를 단숨에 격파하고, 인질극을 벌인 딕을 사살하는데, 이는 상승 - 하강 - 상승을 반복하는 느와르의 구도를 재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황폐한 현실 속에서 유일한 희망은 로보캅이 되찾아가는 인간미입니다. 자신이 살해당한 끔찍한 기억을 되살린 로보캅은,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이제는 모두 떠난 빈집을 방문해 모니터를 박살내며 인간적인 감정인 분노를 드러냅니다. ED-209와의 첫 대결에서 절체절명의 순간, 헬멧 뒤에 감춰진 당황한 눈빛의 인간의 눈동자가 처음 클로즈업 되는 장면은, 그가 로봇이 아니라 인간임을 표출하는 명장면입니다. 딕을 사살하고 임수를 완수한 로보캅이 OCP 회장의 물음에 자신의 이름을 ‘머피’라고 당당히 밝히며 미소 짓는 장면은 그가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왔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네덜란드 출신 폴 버호벤 감독의 출세작 ‘로보캅’은, 코믹북보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오리지널 히어로물로, 1997년 작 ‘스타쉽 트루퍼스’에 계승된 요소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지가 마구 터지고 절단되는 좀비 고어 영화에 가까운 잔혹한 폭력 묘사는 물론이고, 남성을 능가하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 그리고 남녀가 한 곳에서 자연스레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로봇이 주인공인 헐리우드 SF 영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형태의 발달된 기계가 일상생활까지 파고들면서 도리어 상상력의 나래를 축소시킨 것이 원인으로 보입니다. 2011년 개봉을 목표로 ‘로보캅’의 리메이크가 제작되고 있지만 상징으로 풍성한 텍스트이며 진한 감동을 자아난 오리지널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는 되지 않습니다.


덧글

  • 이준님 2009/11/18 09:12 #

    일부에서는 헐리웃 좌파의 망상 운운하는데 감독 자신은 헐리웃에 진출하면서 느낀 미국사회의 인상을 로보캅에서 충실히 반영했다고 하더군요.
  • blitz고양이 2009/11/18 09:34 #

    최근에 1,2편을 봤습니다. 이제는 꽤 오래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재밌더군요.
    TV광고 기법같은거는 정말 스타쉽 트루퍼스와 많이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 아노말로칼리스 2009/11/18 12:04 #

    로보캅이 자신의 옛집을 찾아가서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은 정말 최고였죠.
    로보캅의 감정의 고조를 관객이 고스란히 느낄수 있었습니다.

    요즘 다시보니 로보캅의 마임적 움직임도 흥미롭더군요.
  • 8비트 소년 2009/11/18 16:46 #

    미국사회의 인상을 반영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충실히 재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을 두번 지날 일이 있었는데 로보캅 영화 그대로더군요. ㄷㄷㄷ

    죽은 사람을 기계로 되살린다는 설정이 국민학생에게는 참 참신해 보였습니다.
  • 2010/02/13 12: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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