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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9 - SF, 현실에 두 발을 내딛다 영화

※ 본 포스팅에는 ‘디스트릭트9’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평 일색인 ‘디스트릭트9’을 두 번째 관람했습니다. 슈퍼 히어로물을 포함해 볼만한 SF 영화가 드문 최근 ‘디스트릭트9’이 이처럼 열렬한 지지를 획득한 이유는 무엇인지 초점을 맞췄습니다.

만일 사전지식 없이 관람한다면,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차용한 초반부에 과연 누가 주인공인지 분간하는 것부터 쉽지 않습니다. 다수의 화자들이 카메라를 보며 술회하는데, 그 중에 비커스(샬토 코플리 분)가 주인공이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다른 화자들은 비커스의 과거지사를 회상하며 그 의미를 말하고 있지만, 비커스를 따르는 카메라는 현재적 관점에서 사건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하지만 UFO와 외계인이 등장하는 SF 영화라면 응당 등장해야 할 잘 생기고 영웅적인 주인공을 찾을 수 없기에 비커스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수용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주인공이라면 러닝타임이 종료되는 순간에 생사의 운명이 결정되겠지만, 조연급이라면 언제든지 죽으며 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비커스는 조연이라 판단하여 그가 위기와 맞닥뜨릴 때마다, 혹시 그가 여기서 죽고 진정한 주인공이 돌출하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인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철저히 소시민적인(속된 말로 ‘찌질한’) 비커스는 우리네 보통 사람과 너무도 닮아 있기에, 영웅적인 주인공에 비해 더욱 감정이 쉽게 이입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비커스가 영웅적이었다면 눈앞의 이익이나 개인의 생존보다 대의명분과 집단을 위한 희생 및 초지일관을 멋지게 선택하겠지만, 그는 소시민이기에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언행을 번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SF 영화의 멋들어진 주인공들과 확연히 대조됩니다. 물론 비커스가 자신의 언행을 수시로 번복할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반전의 묘미로 십분 활용합니다. 비커스는 초반부 외계인의 알을 불태우는 것을 즐기며, 외계인의 퇴거를 강제하며 핍박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동체에 감염되어 신체의 변화가 발생한 후부터, 외계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퇴거 현장에서 외계인들의 죽음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비커스가, 실험실에서 외계인의 무기를 다루며 외계인을 실험대상으로 살해하게 되자 거부한 것이 그 시발점입니다. 이미 실험체로 희생된 다른 외계인들과 마찬가지로 산 채로 해부당하기 일보 직전 실험실에서 탈출한 그는, 자신을 숨겨줄 곳은 디스트릭트9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외계인들이 사용했던 너저분한 집에서 밤을 보내고 외계인들이 먹는 캣푸드를 먹으며 서서히 외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외계인처럼 변화된 왼손가락을 도끼로 절단하며 자해했을 때 엄청난 고통이 밀려옴을 자각한 순간, 그는 자신의 몸에 새로이 깃든 외계인의 육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외계인으로의 육화를 인정한 후, 그는 뒤늦게 영웅으로 재탄생합니다. 나이리지아 갱단이 소유했지만, 인간은 아무도 사용할 수 없었던 외계인의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는 외계인 크리스토퍼를 한때 배신하기도 하지만, MNU 건물 습격이나 크리스토퍼 부자의 지구 탈출을 돕는 결정적인, 그리고 대부분의 순간 크리스토퍼의 동료가 됩니다. 즉, 외계인들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 20여년 만에, 비커스는 직접적으로 외계인을 돕는 첫 번째 인간이 되었고, ‘디스트릭트9’은 지구인과 외계인의 버디 무비가 됩니다. 크리스토퍼를 모선으로 보내는데 성공한 후, 비커스는 생명을 잃을 마지막 위기에 처하지만, 외계인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합니다. 최후의 순간 그를 위해 2명의 외계인이 희생당할 정도로, 외계인들은 비커스의 구출에 적극적입니다. 이는 외계인들이 비커스를 자신들의 동족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커스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그들’과 동일해지는 것입니다.

정부 정책으로 차별이 자행된 가장 극심했던 인종차별 국가로, 그 상흔이 남아 있는 남아공을 배경으로 했으며, 주제의식 또한 ‘차별’에 초점을 맞췄기에, ‘디스트릭트9’은 SF 영화이지만 실은 매우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영화입니다. 차별의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지 않는 한, 즉 역지사지가 되지 않는 한 피해자의 입장을 헤아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UFO와 외계인을 소재로 고도의 은유를 통해 입증합니다. 전혀 SF 영화의 주인공답지 않은 비커스를 주인공을 내세우고도 수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발을 현실 위에 굳게 내딛은 채 성립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헐리우드가 아니면 SF 영화가 성립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정관념을 깨끗이 불식시킨 ‘제3세계 SF’의 희망이라는 점에서 ‘디스트릭트9’은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수작 SF 영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제작비와 특수효과가 아니라, 현실과 상상력의 절묘한 접점을 찾는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물론 현실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부조리로 가득해 9시 뉴스만 봐도 충분히 SF적이라, 극장에서 국내산 SF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디스트릭트9 - 설정보다 이야기로 승부하는 SF


덧글

  • 夢影 2009/11/05 12:15 #

    저는 비커스가 죽고 외계인이 대군을 이끌고 돌아와 지구를 정복하는 것으로 끝나는 블랙코메디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따뜻한 결말에, 어? 하고 놀라고 말았죠. 그렇다 하더라도 확실히 좋은 SF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아요. 평범하다 못해, 사실은 좀 그보다 인간성이 좀 못난듯한-바로 나라고 여겨질 정도로- 소시민이 용기를 가지고 '영웅'이 되는 과정을 그린 듯한 느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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